[논평] '춘풍추상(春風秋霜)'과 '과거 관행'

청와대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춘풍추상(春風秋霜): 다른 사람에게는 봄바람(春風)처럼 관대하고, 자기 일에 대해서는 가을 서릿발(秋霜)처럼 엄격해야 한다는 뜻이다.

중국 명나라 말기 문인인 홍자성의 어록을 모은 채근담에 나오는 말이다.

"이 글귀는 고 신영복 선생이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 때의 기억을 살려 지난 2월초 수석보좌관 회의에 배석한 참모들에게 이 글귀를 언급하며 청와대 비서관실에 액자선물을 했다.

이 액자는 청와대 업무동인 여민관에 걸려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최근 모든 부처 장·차관들에게 박근혜·이명박 정부 당시 적폐 수사 경과를 담은 총정리 문건을 내려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민정수석실의 문건 배포 의미를 '춘풍추상'에 비유했다.

청와대가 대통령부터 모든 비서관에 이르기까지 '춘풍추상' 정신을 새기며 일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김기식 금융감독원장.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하지만 최근 김기식 금감원장을 계속 감싸고 도는 모습을 보면 말 따로 행동 따로가 아닌가 싶다.

김기식 원장을 둘러싼 각종 의혹은 하루가 다르게 고구마 줄기 캐듯 나오고 있다.

피감기관의 지원을 받은 외유성 출장 의혹에 이어 셀프 기부, 후원금 땡처리 의혹까지 연이어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김 원장에 대한 경질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을 엿새째 유지하고 있다.

핵심인 외유성 출장 의혹에 대해서는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수용하면서도 적법한 공적 목적의 출장이었다는 입장을 계속 견지하고 있다.

여당인 민주당에서는 김성태 원내대표도 피감기관 지원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며 야당에 대해 역공을 펴고 있다.

"김 원내대표가 산하기관 돈으로 가면 공무고 김 원장이 가면 사무인가"라고 되물었다.

"야당 의원들의 피감기관 지원에 의한 해외출장이나 비서진 대동 등의 사례는 차고 넘친다"며 물타기 공세도 펼쳤다.

물론 김 원장의 행태가 '관행'일 수 있다.

야당의 사퇴요구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무책임한 정치공세'일 수 있다.

그렇다고 청와대의 김 원장 임명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정부라면 '관행'이라며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정치보복이라는 오해를 무릅쓰고 적폐청산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문재인 정부는 그럴 수 없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박근혜·이명박 정부를 겨누고 있는 칼이 다시 자신을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 대통령은 남보다 자신에 대해 훨씬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춘풍추상을 강조했는지 모른다.

춘풍추상이라는 정신에 충실했다면 김 원장 임명은 힘들었을 것이다.


사전 검증과정에서 관행이라는 이유로 외유성 출장에 대해 눈을 감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 원장을 둘러싼 여러 의혹이 사전 검증단계에서 드러나지 않았다면 이후 야당이나 언론에서 제기하고 의혹에 대해 보다 엄격한 잣대를 대고 검증했어야 했다.

계속 야당의 공세를 무책임하다고 몰아붙이며 김 원장을 감싸고 돌 일은 아닌 것이다.

여론도 부정적이다.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 김 원장의 사퇴에 대한 찬성의견이 50%를 넘었다.

민주당과 같은 편에 서왔던 정의당도 등을 돌렸다.

"과거 관행이었다는 핑계로 칼자루를 쥘 만한 자격이 부족한 것을 부족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며 "김 원장의 거취 문제에 대해 자진사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당론을 모았다.

정의당은 특히 문재인 정부 인사에서 논란이 되는 후보에 대해 반대입장을 취하면 모두 낙마하면서 '정의당 데스노트'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정당이다.

청와대로서는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다.

청와대는 12일 오후 뒤늦게 "피감기관의 비용부담으로 해외출장 가는 게 적법한 지 등 각종 논란의 적법성 여부를 따지기 위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질의사항을 보내 공식적인 판단을 받아보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19~20대 국회의원들의 피감기관 지원을 받은 해외출장 사례조사 결과를 들면서 "김 원장이 자신의 업무를 이행 못할 정도로 도덕성이 훼손됐거나 일반적 국회의원의 평균 도덕적 감각을 밑도는지 의문"이라고 주장했다.

'과거 관행'을 고수하는 시각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민관에 걸려있는 춘풍추상이라는 글귀를 무색하게 하는 행보라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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