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김정은 북 노동당 위원장의 만찬사 가운데 일부이다.
눈에 띄는 대목은 '전격적으로 방문했다'는 것과 '(시진핑 주석이)바쁘신 속에서도 친히 시간을 내주시고'라는 부분이다.
김 위원장의 베이징 방문이 매우 짧은 시간에 전격적으로 성사됐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김 위원장의 중국 방문은 언제 결정됐을까?
최근 남북과 북중. 한미,한중 간의 외교채널은 숨쉴틈 없이 돌아갔다. 정의용 대북특사가 미국 워싱턴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5월 북미정상회담 카드'를 들고 온 시점이 3월 11일이다.
정 특사가 중국 베이징에 간 시점에 양제츠 중국 정치국 위원의 서울방문이 결정됐고 그 시점은 3월 21일에서 22일로 잡혔다.
하지만 청와대는 3월 16일 "양제츠 정치국 위원의 방한 일정이 29일경으로 연기됐다"고 발표했다. 정 특사가 중국·러시아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다.
이같은 한중간 숨가빴던 외교일정과 김정일 위원장의 만찬사를 보면 김 위원장의 베이징 전격방문은 3월 15일쯤 갑자기 결정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스웨덴 방문을 위해 평양에서 베이징으로 나온 시점도 3월 15일이다.
◇김정은 "베이징 통해 비핵화 발언 취지 다시 한번 환기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정의용 대북특사는 지난 6일 발표문에서 "북측은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정의용 특사를 통한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씩 폭발적인 내용들이어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안전이 보장된다면"이라는 조건은 이내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 갔다.
그도 그럴것이 정 특사 방북은 트럼프 미 대통령으로부터 5월 북미정상회담 카드를 생산시킴으로써 언론과 많은 전문가들은 '북한의 비핵화'에만 초점을 맞추게 됐다.
이어 청와대 관계자가 '원샷 해결,고르디우스의 매듭.일괄타결.톱다운 방식' 같은 '휘발성'이 큰 단어들을 언급했고, '비핵화가 마치 한방에 해결될 수 있다'는 논리적 모순은 강화됐다.
물론 정부는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둘 다 '지도자 결단'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큰 틀의 합의'를 염두해 뒀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비핵화 논쟁은 '군사적 위협 제거나 체제보장 요구'는 온데간데 없고, '선 핵폐기, 후 보상'의 대표적 사례인 리비아 방식만 워싱턴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됐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런 상황을 상당히 우려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외교 소식통은 "김 위원장으로서는 상당히 답답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을 열겠다고 해놓고 미국에서는 아무런 대화제의나 언급이 없고 리비아방식만 해법으로 거론되는데 대해 매우 불쾌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한국의 대북특사가 북미정상회담이라는 경천동지할 '사건'을 만들었지만 서울과 워싱턴에서 북한의 일방적 조처만 논의되는 현실을 더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개연성이 높다.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김 위위원장의 발언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선대의 유훈에 따라 한반도 비핵화 실현에 힘쓸 것이며, 남한과 미국이 평화 실현을 위해 '단계적, 동시적 조치'를 취하면 비핵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정 특사에게 예기한 내용과 비교하면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 해소와 체제안전이 보장된다면'이 '단계적.동시적'이라는 말로 대체된 것일 뿐 똑같은 내용이다.
미국과 직접 소통창구가 없는 김 위원장은 베이징 방문을 통해 북한의 입장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은 액면그대로 서울과 워싱턴에 전달됐다. 보수언론들은 마치 몰랐던 일인양 떠들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다.
대북 소식통은 "김 위원장이 서울을 통해 미국과 비핵화협상 의지를 전달했지만, 일방적 논쟁으로 발전하자 베이징 통로를 활용해 북한의 스텐스를 되찾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꼐자는 "김 위원장은 미국과 담판에서 한국만 믿고 갈 수 없다는 판단을 한것이고 중국을 끌어와야 한다는 사실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