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상> 삼키는 "미투"…뿌리깊은 장애여성 성폭력
<하> 택시 타면 "성경험 있나?"…"애인하자" 신체접촉도
김효진 대표는 "장애여성들이 경험하는 성폭력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재가장애여성 성폭력 가해자는 주로 이웃·근친·남자친구처럼 평소 아는 사람이 38.8%를 차지한다"며 "이는 장애여성을 보호해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장애여성의 약점을 이용하고 자신들의 우월한 위치를 악용해 성폭력을 가한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이어 "사람들은 대체로 강간에 해당하는 성폭행만을 성폭력으로 생각하지만, 장애여성에 대한 성희롱, 성추행은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며 "그 대표적인 예가 택시 기사들의 성희롱, 성추행이다. '애인은 있느냐?' '성경험은 있느냐?'는 질문은 다반사고 '애인 해주겠다' '함께 놀러가자'며 신체접촉을 시도한다. 심지어 집에까지 따라오는 경우도 있다"고 고발했다.
"장애인 콜택시라는 게 있는데, 기사가 길이 막혀 거의 서 있다시피 한 차 안에서 백미러로 장애여성을 힐끗거리며 자위를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장애인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원해 주는 활동보조인의 경우에도 2012년부터 2016년 감사원이 범죄경력을 조회해보니 서울시·경기도 활동보조인 가운데 성폭력전과자가 13명이나 있었어요."
실제로 2014년 장애인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장애 유형 가운데 정신장애 10.7%, 언어장애 5.5%, 지적장애 4.9%가 성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적장애인 성폭력 문제는 이보다 훨씬 심각하다. 전국성폭력상담협의회에 따르면, 지적장애인 성범죄 피해는 연간 1250건으로 전체 성범죄 피해의 절반을 웃돈다.
김 대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큰 틀 안에서 사회 인식 변화는 물론, 장애여성들의 부모도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장애 여아·소녀를 둔 부모가 자녀의 여성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경우는 정말 많아요. 성 인지 교육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면 '우리 애는 그런 것 몰랐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거죠."
결국 장애여성들은 '장애'를 지녔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정체성마저 빼앗기는 셈이다. 세 살때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허리 아래가 마비된 이래 지체장애를 안고 살아 온 김 대표는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며 말을 이었다.
"과거 나의 어머니 아버지도 여성성을 발현하는 것을 굉장히 위험시하셨죠. 그런데 지금 장애 여아·소녀 부모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녀의 성 인지를 가로막음으로써 성정체성을 올바르게 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겁니다."
그는 "장애여성 부모들이 먼저 변해야 한다. 부모들이 일상에서 쓰는 언어, 태도가 바뀌는 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며 "이를 통해 장애여성들이 사회에 나가더라도 성정체성을 침해당하는 인격 모독을 스스로 인지하도록 함으로써 대응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 "시스템 마련 없이는 반짝 관심 모았다가 흐지부지 되는 악순환만 되풀이"
"장애계 안에서 성폭력은 여전히 사소한 문제로 취급받고 있어요. 지금 미투 운동이 불붙어도 남성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여자들하고 말도 섞지 말아야겠네' '여자들하고 악수도 하지 말아야겠네'라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장애계는 그 이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는 "예를 들어 '저 사람은 맨날 사소한 문제를 갖고 트집만 잡는다' '저 사람에게 말 걸었다가는 봉변당할 수 있다' '조직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낙인을 찍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지금 미투 운동 흐름에서 장애여성들 목소리를 모아보자는 생각은 굴뚝 같아요. 그럴 마음도 먹었고요. 주변 사람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뜻을 모으면서도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끝까지 가서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의 성과라도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으니까요."
김 대표가 대한민국 인권상을 받은 데는, 앞으로 정부가 장애여성 인권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담겼을 터다. 그는 "그랬으면 좋겠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번에 예상 못한 인권상을 받은 것도 20년 동안 장애여성 인권을 위해 뛰어 온 노력을 처음으로 인정받은 겁니다. 아직까지 장애인 인권이 밑바닥에 있기 때문에 장애여성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중에 해야 할 일이라는 분위기예요."
그는 "비장애계에서 여성 인권 등이 항상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돼 우선순위에서 밀려 온 것과 마찬가지"라며 "정작 장애여성들 사이에서도 '우리 문제는 나중 아닐까'라고 여기게 되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장애여성들에 대한 일상적인 성폭력을 시스템으로 점검하는 구조적인 변화 없이는, 큰 사건이 터졌을 때 반짝 관심을 모았다가 흐지부지 되는 악순환만 되풀이될 수밖에 없어요. 지금처럼 많은 장애여성들이 스스로 성폭력을 인지하지 못하는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성인권교육진흥원' 설립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심장 떨리는 나날들…장애·비장애 여성 목소리 함께 울려 퍼졌으면"
그는 "위탁 조직의 경우, 관련 기관의 협조를 이끌어내기가 어렵고 여기저기 이권이 개입할 여지도 크다"며 "1년에 한두 번 이뤄지는 형식적인 의무교육을 일상의 시스템으로 만들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이어 "실제로 우리 단체에서 관련 시설을 방문해 교육을 하면 분명히 문제가 보인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파고들면서 매달릴 수 없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알다시피 성폭력 교육은 성인권 교육 가운데 일부분일 뿐입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장애여성들을 대상으로 어린 나이 때부터 꾸준히 준비해 나가야 인식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봅니다."
"장애여성 성폭력 문제 역시 권력구조, 조직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김 대표의 지론이다. 그가 수십 년간 장애여성 인권 운동을 이어오면서 매일 같이 피부로 절감한 것이다.
"현재 미투 운동으로 불거지는 문제가 성(性)적으로 부각됐지만, 사실 우리 사회가 여성 등 약자를 억압해 온 일그러진 일상의 문화를 드러내고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장애여성들을 배려하고 우호적으로 대하는 조직 문화는 없습니다. 이번 미투 운동이 좋은 성과로 이어져 우리 사회 전반적인 조직 문화가 바뀌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 대표는 "장애계 안에서 남성들에게 기대하기보다는, 비장애 여성들과 함께 우리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연대 지점을 찾기 위해 애쓰겠다"며 "이번 미투 운동이 그러한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전했다.
"장애계에서 장애여성들은 수적으로 적지 않지만, 사회적인 힘이 없기 때문에 소수자입니다. 소수자가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죠. 이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결국 사회적인 연대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는 "미투 운동을 매일 심장 떨리게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장애여성들의 외침이 비장애 여성들의 목소리와 함께 울려 퍼질 날을 그리는 까닭이다.
"이번이 정말 좋은 기회입니다. 가해자 몇 사람을 처벌하는 데서 그칠 문제가 아니라, 권력 구조까지 재편할 수 있는 힘으로 밀고 나가기를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장애여성들이 연대할 수 있는 사회적 끈도 만들어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