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률의 평창 레터]"승훈이 삼촌, 아니 형! 자전거 사줄 거죠?"

'재원아, 정말 고맙다' 이승훈이 24일 오후 강원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오벌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매스스타트' 결승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뒤 정재원을 안아주고 있다.(강릉=이한형 기자)
13살 차이가 무색한 뜨거운 브로맨스였습니다. 언뜻 보면 삼촌과 조카 뻘로 여겨지지만 나이와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으로 한국 스포츠의 새 역사를 합작했습니다.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장거리 대표팀의 간판 이승훈(30·대한항공)과 막내 정재원(17·동북고)입니다. 둘은 24일 강원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오벌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매스스타트 결승에 나란히 출전해 금빛 합주를 펼쳤습니다. 이승훈이 특유의 폭발적인 스퍼트로 가장 먼저 결승선에 들어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정재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승훈의 금메달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정재원은 16바퀴를 도는 레이스 중후반까지 후미에서 선두 그룹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다 4바퀴를 남긴 시점에서 스피드를 올려 선두와 격차를 줄였습니다.

후미에서 체력을 비축한 이승훈은 여기서 탄력을 받아 스피드를 끌어올렸고, 2바퀴를 남긴 시점에서 전속력으로 질주해 짜릿한 역전 우승을 일궈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다한 정재원은 이승훈이 질주를 펼치자 허리를 펴고 선배의 우승 레이스를 흐뭇하게 지켜봤습니다.


금메달이 확정된 뒤 이승훈은 누구보다 먼저 정재원을 찾아가 따뜻하게 안아줬습니다. 그리고 태극기를 함께 들고 트랙을 돌면서 열띤 응원을 펼쳐준 관중을 향해 인사를 했습니다. 스피드스케이팅의 마지막 날 극적인 우승을 이뤄준 한국 빙속의 현재와 미래에게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습니다.

'이 친구가 정재원입니다' 24일 오후 강릉 오벌 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매스스타트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이승훈이 레이스를 도와준 정재원을 안아주고 있다.(강릉=노컷뉴스)
이후 더욱 진한 우정의 인터뷰가 이어졌습니다. 먼저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 나선 정재원은 "오늘의 제 레이스가 우리 팀에 도움이 됐다는 것, 우리 팀이 승훈이 형이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는 것이 기쁘고 형에게 축하한다"며 고교 2학년생 답지 않은 의젓한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번 레이스에서 정재원의 목표는 자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형의 우승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재원은 "처음부터 그 역할(선두 견제)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들어갔다"면서 "(레이스 후반부) 치고 나갔을 때 승훈이 형이 나가는 것까지만 보고 내 역할은 끝났다 생각하고 형이 몇 등으로 들어오는지만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희생이 아니라 팀이었기에 당연했다는 겁니다. 정재원은 "이번 올림픽에서는 형들에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21일 팀 추월에서 정재원은 이승훈, 김민석(19·성남시청)과 함께 은메달을 합작했습니다. 사실 이승훈이 가장 체력 소모가 큰 선두에서 막판 질주를 펼치며 10대 듀오를 이끌고 얻어낸 메달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재원은 매스스타트 결승에 대해 "우리 팀이 금메달을 따서"라는 표현을 쓴 겁니다.

이승훈도 자신의 뒤를 이을 유망주를 친히 팬들에게 소개했습니다. 정재원은 "승훈이 형이 금메달 땄다는 거에 기뻤는데 저를 그렇게 (함께 관중에게 인사를) 한 것은 고마움의 표시잖아요"라면서 "관중 앞에서 같이 해줬기 때문에 고마웠다"고 감사의 뜻을 드러냈습니다.

정재원에게 이승훈은 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재원은 초등학교 시절 2010년 밴쿠버올림픽에서 이승훈이 아시아 최초의 장거리 메달(5000m 은)과 최초의 1만m 금메달을 따내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후 스케이팅을 시작한 2014년 소치올림픽 팀 추월 은메달도 지켜봤을 겁니다. 정재원은 "형이 운동에 임하는 자세나 마인드를 보면 정말 괜히 세계 랭킹 1위가 아니구나 느낀다"면서 "같이 운동할 때 그 마인드를 배운다"고 존경심을 드러냈습니다.

'형 내가 먼저 끌어줄게' 24일 강릉 오벌 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매스스타트에서 정재원(왼쪽)이 레이스 후반부 속도를 내며 경쟁자들을 유도하는 사이 이승훈이 스퍼트 기회를 엿보고 있다.(강릉=노컷뉴스)
다만 형이라고 하기에는 나이 차이가 너무 나는 것은 아닐까? 정재원은 아직 고교생이고, 이승훈과는 띠동갑이 넘습니다. 정재원이 "친구들이 평소 그런 말을 안 하는데 (올림픽 기간) '멋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개학하면 좀 달라져 있을 것 같다"면서 "친구들이 사인을 해달라고 하면 해주는 대신 뭐 얻어먹고 싶다"며 웃을 때는 영락없는 평범한 10대입니다.

정재원도 "삼촌이라고 하기에는, 나이 차로는 삼촌이 맞는 것 같기도 한데"라며 취재진의 폭소를 자아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승훈이 형이 엄청 편하게 대해주기 때문에 형이라는 게 어색하지 않다"고 서둘러 진화(?)에 나섰습니다.

갖고 싶은 것도 많을 나이입니다. 특히 형이 크게 한턱을 내야 할 상황. 정재원은 "이승훈이 뭐 해주겠다고 하는 것이 없느냐"는 질문에 "승훈이 형이 계속 고맙다고 했는데 '제가 사이클이 없거든요' 하고 말했다"고 귀띔하더군요. 금메달 도우미라면 그 정도는 해줄 법도 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정재원은 그저 어린 친구가 아닙니다. 17살답지 않은 속깊은 막내입니다. 정재원 "형이 사이클을 사주겠다고 하는데 나는 엄마한테 사달라면 되니까 (형의) 마음만 받으면 돼요"라고 마치 자신이 30살처럼 말하더군요. 또 "(올림픽 메달로) 17살에 병역 혜택을 받게 됐다"는 말에도 "아직 어려서 실감은 나지 않는다"면서도 "더 열심히 운동하라는 의미로 알고 열심히 운동해야죠"라고 강조했습니다.

4년 뒤에는 어쩌면 형들보다 더 자랐을지 모릅니다. 정재원은 "다음 올림픽 때는 내가 형들에게 도움을 줘서 꼭 1등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습니다. 이러니 13살 차이라도 이승훈을 삼촌이 아닌 형이라고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걸 겁니다.

이승훈도 역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의 맏형입니다. 정재원의 인터뷰 뒤 믹스트존에 들어선 이승훈은 "(사이클을) 사준다고 이미 얘기했습니다"며 약속 이행의 뜻을 확실히 했습니다. 앞서 이승훈은 중계 방송 인터뷰에서 "같이 뛰어준 재원이가 너무 고맙고 나보다 멋진 선수가 될 것"이라며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13살 차이 삼촌과 조카뻘, 아니 형과 동생이 보여준 감동의 레이스. 4년 뒤 베이징에서 펼쳐질 제 2탄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정말 고맙다' 24일 오후 강릉 오벌 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매스스타트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이승훈이 레이스를 도와준 정재원을 안아주고 있다.(강릉=노컷뉴스)


ps-평창올림픽에 앞선 거의 꼭 1년 전 이번과 비슷한 레터를 띄운 적이 있습니다.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이 열린 지난해 2월 23일입니다. 당시도 이승훈은 매스스타트에서 정상에 올랐는데 함께 뛰며 도움을 준 이진영(25·강원도청), 김민석에 대해 고마움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물론 이승훈은 앞선 팀 추월에서 동생들을 이끌고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놀랍게도 당시 레터([임종률의 삿포로 레터]후배들이 헌정한 4관왕, 완치된 '맏형의 찢긴 다리')의 마지막 문장은 '이런 뜨거운 브로맨스가 내년 평창에서도 이어지길 바라 마지 않습니다'였습니다. 그때 레터처럼 올해 평창에서도 이승훈이 뜨거운 브로맨스를 펼친 겁니다.

당시는 이승훈이 동생들을 이끌고 현지 맛집을 찾아 부타동(돼지고기 덮밥)으로 한턱을 쐈습니다. 사실 평창올림픽 전 이승훈과 인터뷰에서 "이번에도 대회가 끝나고 교동짬뽕 등 강릉의 유명한 맛집을 갈 거냐"고 물었습니다. 이승훈은 "좋은 성적 내면 한번 가야죠"라고 웃으며 답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번에는 지난해처럼 경기 당일이 아니라 시간상 다음 날이 되겠군요. 25일 점심 무렵 강릉 맛집에 이승훈이 동생들과 출몰할 수 있으니 유심히 지켜보기 바랍니다. 아차, 정재원은 ISU 주니어 월드컵 출전으로 26일 미국 출국을 위해 25일 올림픽 선수촌에서 퇴촌해 없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꼼짝없이 자전거로 한턱을 내야 할 이승훈입니다. 4년 뒤 베이징에서도 뜨거운 브로맨스가 이어지길 바라 마지 않습니다. 즐거운 징크스를 예고해봅니다.

지난해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매스스타트에서 우승한 이승훈(오른쪽부터)이 김민석, 이진영 등 동생들과 현지 맛집의 돼지고기 덮밥을 먹는 모습.(자료사진=노컷뉴스)


평창동계올림픽 빙상, 컬링, 아이스하키 등이 열린 강릉은 제법 맛집들이 많다. 자연산 홍합을 넣은 섭국(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과 산나물, 해물짬뽕, 장칼국수 등은 한번쯤 먹어볼 만하다. 꼬막무침+볶음밥, 감자 옹심이 등도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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