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에 대한 감찰 직무를 유기한 혐의 등이 인정된 법정에서, 한 때나마 최고 권력의 곁에 머물렀던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노력과 능력, 재력, 운에 관운까지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던 우 전 수석의 몰락이다.
어린 시절부터 '영주 천재'로 불렸던 우 전 수석은 서울대 법대 3학년에 최연소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그는 1990년 서울지검 검사로 발령받았다. 역시 23살, 그 해 신임 검사로 임용된 동기 70명 중 최연소였다.
일찌감치 그는 검찰 내부에서 '워커홀릭형 독종검사'로 통했다. 20대 중반인 1993년 경주대경기전문대 이사장이었던 김일윤 전 의원을 공금 횡령 혐의로 구속기소한 것을 비롯해 거침 없는 수사로 이름을 알렸다. 그와 함께 일했던 후배들은 "배운 게 많았지만, 다시 떠올리기 싫은 시절"이라고 말할 정도라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우 전 수석이 죽음으로 내몬 데 일조한 노무현 대통령 시절, 그는 법무부와 경제부처 파견에 서울지검까지 노른자위 보직을 꿰차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런 흐름을 타고 검사 경력 만 20년이 되던 해 우 전 수석은 검사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대검찰청 중수1과장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우 전 수석의 검사 인생도 막을 내린 듯 보였지만, 그는 김준규 검찰총장 시절 총장의 '복심'으로 통하는 대검찰청 범죄정보기획관으로 영전하면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사법연수원 19기 동기 중에서도 선두그룹을 내내 유지했던 그는 검사장 승진에서 밀리자 2013년 5월 검찰을 떠났다. 이명박 정부에서 '노무현 수사 검사' 꼬리표를 부담스러워 했을 것이란 얘기가 돌았다.
그러나 1년 뒤 우 전 수석은 박근혜 정부에 민정비서관으로 발탁돼 다시 한번 재기에 성공한다. 8개월만에 민정수석이 되면서 우병우 '사단'을 거느리는 등 검사장 부럽지 않은 권세를 누리게 된다. 검찰과 국정원, 국세청까지 사정기관을 손 안에 넣은 뒤 '리틀 김기춘'이라는 꼬리표도 새로 달았다.
더 이상 재기를 엿보지 못할 내리막 길은 여기서부터다.
그러나 우 전 수석에 대한 수사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총 다섯 번 검찰과 특별검사팀에 소환됐고, 세 번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그리고 결국 지난해 12월 국가정보원을 동원해 민간인 등을 불법사찰한 혐의로 결국 구속됐다. 우 전 수석이 최후 진술에서 "누가 봐도 표적수사로 과거 (노 전 대통령 주임)검사로서 처리한 사건에 대한 정치보복"이라고 반발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이 정도가 되면 일각에서 '표적수사'에 대한 얘기가 나올 법도 하지만, 우 전 수석에 대해서는 별 얘기가 없다. 심지어 야당인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문 대통령을 두고 "노무현 정부에서 우병우 역할을 했다"고 말할 정도로, 우 전 수석은 국정농단의 여러 상징 중 하나가 돼있다.
그만큼 박근혜정권 청와대에서 그의 권세는 대단했다. 재력가 장인이라는 뒷배에 내리막길에서도 잇따라 재기해왔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많이 달라 보인다. "일말의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로 변명으로 일관하고 반성하지 않았다"는 재판부의 지적을 보면, 우 전 수석은 아직 상황의 변화를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