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와 본 ‘블랙팬서’…“마블이 또 해냈다”

[노컷 프리뷰] 마블 덕후 P기자와 본 영화 ‘블랙팬서’

직장 동료 P기자는 마블과 DC의 마니아다. 친근한 표현으로는 덕후. 영화가 개봉하면 취재차 간 지방에서도 심야 시간에 극장을 찾아갈 정도로 그는 히어로 무비에 열광한다. 영화를 본 후에는 전문가 냄새를 풀풀 풍기는 글을 SNS에 올린다.

P기자의 넘치는 재능을 그간 눈여겨보다, 이번에 개봉하는 ‘블랙팬서’ 영화 시사회에 함께 갈 것을 제안했다. 가공되지 않는 날 것의 평을 프리뷰 기사에 담고 싶어서였다. P기자의 정체는 본인의 요청으로 숨겼다. (콜록!)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콜록!) [편집자 주]

블랙팬서. (영화 블랙팬서 스틸컷)

#1
영화 시작 30분 전인 오후 1시 30분, 남산 인근에서 긴급한 일정을 마치고 용산 극장에 온 P기자는 내게 커피를 마실 건지 물었다. 영화를 보며 마실 생각으로 ‘이따 사서 들어가자’ 했더니, 그는 ‘마블 영화를 보면서는 음료를 마시지 않는다’며 먼저 사서 마시기 시작했다.

이해가 안 됐다. 팝콘과 음료를 즐기며 영화를 보는 게 재미라면 재미일 터인데. ‘원래 영화 볼 때 음료를 안 먹느냐’ 물으니, 그는 ‘화장실에 갈 일이 생길까봐’라고 답했다. 자신의 방광에게조차 방해받을 수 없다는 그의 태도에서 범상치 않은 경건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2
러닝타임 135분의 영화 ‘블랙팬서’를 엔딩 크레딧까지 다 본 후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상영관을 나왔다. 한참을 침묵하는 그에게 한 줄 평을 물었다. 그는 “아” 짧게 탄성을 뱉은 뒤 “마블이 또 해냈다”고 입을 뗐다. 그러면서 “DC가 참 안타깝다”고 읊조렸다. 두 라이벌 회사의 건전한 긴장 관계를 바라는 덕후로서, 압도적으로 뒤처지는 DC를 걱정하는 그는 참 사려가 깊었다.


(영화 '블랙팬서' 스틸컷)

#3
“마블이 또 해냈다”라는 표현은 그저 ‘재미있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P기자는 “마블이 또 새 캐릭터를 연착륙시켰다”는 의미라 했다. ‘블랙팬서’는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히어로다. 그런 히어로의 솔로 무비는 흥행을 장담하기 어렵다. 히어로의 탄생 과정 등 지루할 법한 이야기를 관객에게 이해시키고자 한 편에 다 집어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자잘한 이야기는 과감히 생략했다. 와칸다가 어떠한 나라인지, 과학 기술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그 역사는 어떠했는지 등을 부연하지 않고 영화를 따라가며 자연스레 익히도록 했다. P기자는 “여타 마블 영화를 보지 않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독립적인 영화”라고 평했다. 영화는 ‘블랙팬서’이자 와칸다의 왕자 티찰라(채드윅 보스만 분)가 진정한 와칸다의 왕이자 후대 블랙팬서로 자리 잡는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그린다.

(영화 '블랙팬서' 스틸컷)

#4
‘블랙팬서’가 국내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부산에서 촬영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마블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도 서울에서 촬영한 바 있다. 하지만 서울의 비중은 크지도 않으며, 인상적 혹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반면 ‘블랙팬서’는 부산의 비중이 생각 이상으로 크게 나온다. 주무대인 와칸다라는 가상 국가를 제외하면 부산이 두 번째로 비중이 크다. 자갈치시장과 도심, 광안대교, 바닷가 등 부산의 주요 랜드마크를 관통하며 부산의 정취와 매력을 뽐낸다.

P기자는 특히 티찰라의 연인 나키아(루피타 뇽 분)의 한국어가 압권이었다고 꼽았다. 어색한 한국어가 웃음을 터트리게도 하지만, 그럼에도 일부러 한국어를 넣었다는 점은 마블이 한국을 향해 어느 정도로 애정을 갖고 있는지 느끼게 한다. 또 부산 장면 중 싸이의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점도 동일선상에서 볼 수 있다.

'블랙팬서'의 숙적 에릭 킬몽거(왼쪽). (영화 '블랙팬서' 스틸컷)

#5
P기자는 악역을 맡은 에릭 킬몽거(마이클 B.조던 분)도 인상 깊었다고 했다. “그동안 마블 영화 중 역대급 악역이다. 포스나 주인공을 몰아붙이는 감정 등이 뛰어났다”고 평했다. 그동안의 악역들이 악한 면만 강조됐다면, 킬몽거는 관객이 설득될 수 있는 사연을 지니고 있엇다. P기자는 마블 영화 중 비슷한 느낌의 악역으로 ‘캡틴 아메리카 : 윈터솔져’에서 등장한 ‘윈터솔져’를 꼽으면서, “악역이 살면 영화도 산다”며 흥행을 점쳤다.

슈리역의 레티티아 라이트. (영화 '블랙팬서' 포스터)

#6
하지만 P기자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로 에릭 킬몽거보다는 슈리(레티티아 라이트 분)를 꼽았다. 슈리는 티찰라의 여동생이자 와칸다의 과학자이다. 블랙팬서의 수트와 무기 등을 업그레이드하는 역할을 한다.

P기자는 “와칸다는 과학은 발전했지만, 정체를 드러낼 수 없는 오랜 전통이 있는 엄숙한 곳이라 영화가 자칫 무거워질 수도 있었는데, 슈리가 밝고 경쾌한 이미지나 대사들로 이 분위기를 상쇄시켰다”고 했다.

또 “과학자로서는 진지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여 와칸다가 수준 높은 과학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자연스레 소개했다”고 했다. P기자는 영화가 개봉하면 슈리 역의 레티티아 라이트가 크게 뜰 것이라는 예측도 전했다.

악당 타노스. (제공 사진)

#7
지난 10년간 모든 마블 영화는 약간의 경중은 다르지만 하나의 꼭짓점을 목표로 이야기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오는 4월 개봉하는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이다. 때문에 이 영화 직전에 개봉하는 ‘블랙팬서’에 수많은 단서가 담길 것으로 팬들은 기대했다. 마블 측도 “티찰라의 이야기는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와 연결되어 있어 매우 중요하다”며 “의도적으로 ‘블랙팬서’를 직전에 배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영화는 사실상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에 대한 단서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P기자 역시 “잘 보이지 않았다”고 의아해했다. 쿠키 영상도 2개인데, 이 역시 기대한 만큼 ‘어벤져스’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P기자는 “그동안 정체를 숨기던 와칸다가, 앞으로는 세계를 돕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고 공표하는 점” 등을 꼽으며, 이는 와칸다가 추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암시되는 대목이라고 풀이했다.

지금까지 공개된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 티저 영상에서 와칸다와 지구로 쳐들어온 우주 최고 악당 타노스의 부하들이 들판에서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또 타노스가 스파이더맨과 아이언맨을 주먹으로 때려눕히는 장면도 등장한다.

와칸다의 자원인 비브라늄(영화 세계관에서 등장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금속)이 타노스를 물리치는 데 나름의 큰 역할을 할 것이고, 이 비브라늄을 제공하는 등의 시작점이 바로 ‘와칸다가 세계를 돕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일’일 것이라는 게 P기자의 추측이다.

율리시스 클로(앤디 서키스 분)와 에버렛 로스(마틴 프리먼 분). (사진=영화 '블랙팬서' 스틸컷)

#8
마블 특유의 깨알 유머도 볼거리다. P기자는 특히 율리시스 클로(앤디 서키스 분)가 부산에서 비브라늄을 거래하려고 꺼냈을 때 그 포장지에 ‘파손주의’라고 써 있는 것을 백미로 꼽았다. 비브라늄은 앞서 말했지만, 영화 세계관에서 절대 부러지지 않는 강도의 강한 금속이다.

또 총상을 입은 에버렛 로스(마틴 프리먼 분)가 최첨단 장비로 빼곡한 와칸다의 한 실험실에서 깨어나자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다. 그러자 티찰라의 동생 슈리는 “캔자스”라고 답하는데, 사실 캔자스는 미국에서도 논밭 위주인 시골 중의 시골이다. P기자는 “최첨단 과학 시설이 즐비한 실험실에서 ‘캔자스’라고 말하는 게 유머 포인트”라고 귀띔했다.

#9
참고로 P기자는 NBA 덕후이기도 한데, 그는 전문가의 관점에서도 몇 가지 재미있는 점을 발견해 알려줬다. 먼저 영화 초반과 후반에 어린이들이 길거리에서 농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트래블링(traveling, 농구 경기에서 공을 가진 선수가 3보 이상을 이동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영화를 보다 갑자기 트래블링 수신호를 해,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을 놀라게 했다.

또 농구를 하던 어린이 중 한명이 드리블을 하면서 당시 유명한 NBA 선수의 이름을 언급한다. 참고로 자막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P기자는 “NBA 팬들을 위해 그 선수의
이름은 기사에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사진=영화 '블랙팬서' 스틸컷)

#10
영화 ‘블랙팬서’는 마블 최초의 흑인 히어로 영화인만큼 캐스팅의 90%가 흑인이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히어로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조금은 다른 지점의 의미 있는 메시지가 있다. 바로 인종 차별(피부색 차별)과 관련한 이야기가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 소재로 다뤄진다는 것이다.

티찰라의 연인 나키아도, 숙적 에릭 킬몽거도 흑인들이 받아온 차별과 억압의 역사를 언급하며 와칸다가 고통받는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1960년대 ‘블랙팬서’ 코믹스가 나왔을 당시 급진적 흑인 인권 단체인 ‘블랙팬서당’과 이름이 같아 흑인 운동을 지지하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코믹스가 당보다 먼저 나온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은 일단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기존의 히어로 영화가 가상의 세계에서 악당으로부터 지구나 도시를 지키는 내용이라면, ‘블랙팬서’는 가상의 세계인 점은 동일하지만, 실제로 받은 차별의 역사와 싸움의 악순환이라는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는 현실 세계에서도 통할 법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는 기존의 히어로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묵직한 메시지이다. 이런 점에서 ‘블랙팬서’는 한 단계 진화한 히어로 무비라고 꼽고 싶다. 영화는 2월 1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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