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은 "국민의 삶을 지키는 것을 정부의 최우선 역할로 삼아야 한다"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 정부가 하는 모든 일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불과 일주일여전인 지난 22일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또다른 행사를 주재했다. 현 정부 들어 처음 열린 '규제혁신 대토론회'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신제품과 신기술은 시장출시를 우선허용하고 필요시 사후 규제하는 방식으로 규제체계를 전면적으로 전환해보자"며 "그야말로 혁명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포괄적 네거티브'다. '원칙 허용-예외 금지'를 골자로 한 기존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개념이다.
문 대통령은 "한국에서 규제혁신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됐지만 국민들은 그 성과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실제로 '규제혁신' 논의는 역대 정권마다 단골 메뉴였다. 이명박정부의 '전봇대 뽑기'나 박근혜정부의 '손톱밑 가시 빼기' 등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적폐 청산'을 기치로 내건 문 대통령 역시 규제 완화에 나선 것은 경제 정책의 양대 축으로 급부상한 혁신성장과 무관치 않다.
당초 문 대통령과 여권은 제이노믹스의 핵심 정책으로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를 내세웠지만, 지난해 하반기를 전후해 급속도로 혁신성장에 무게를 싣기 시작했다.
현 정부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 참여했던 국민대 조원희 교수는 "공공성을 해치는 측면에선 규제가 당연히 강화돼야 하지만, 혁신성장 측면에선 대기업이라도 어떻게든 도와주겠다는 게 정부 방침"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공평한 분배'와 '경제 민주화'에 찍혔던 경제 정책의 방점이 다시 '성장'으로 옮겨가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파이를 키워야 나눠 먹을 것도 생긴다는 '낙수론'(落水論)이 다시 고개를 든 셈이다.
규제 완화를 줄곧 부르짖어온 재벌 등 대기업과 재계가 문 대통령의 '포괄적 네거티브' 방침에 일제히 환영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가 4차산업혁명 위주의 신산업에 한정된 규제 완화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경계 자체가 모호해 결국 모든 분야의 주요 규제를 허무는 '트로이 목마'로 기능할 개연성도 크다는 지적이다.
환경운동연합 생태보전팀 맹지연 국장은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전예방'임에도 이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며 "규제는 곧 룰(rule)인데, 사후에 만드는 룰이 세상 어디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맹 국장은 "예를 들어 DDT가 처음 개발됐을 때 유해곤충을 잡는데 효용이 크다는 이유로 사람 머리에도 뿌리고 했지만 알고보니 엄청난 발암 물질이었다"며 "그때와 달리 지금은 예방하고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기술이 축적됐는데도 이를 활용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특히 정부가 '38개 우선과제'로 내놓은 규제 완화 목표 가운데 상당수가 국민 생명과 보건에 직결되는 사안들이란 점도 지적된다. 유전자 치료 허용이나 '개인 의뢰 유전자검사'(DTC) 광고의 무심의 허용이 대표적이다.
이어 "규제는 꼭 필요한 우리 사회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라며 "불필요한 규제가 있다면 그걸 찾아 개선하는 식이 돼야지, 19세기 발상인 네거티브 방식은 커다란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빅데이터와 핀테크 활성화의 하나로 내세운 '건강증진형 보험상품 추진' 역시 문제로 거론된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발달한 공적보험을 민간보험과의 경쟁 체제로 내모는 시대 역행이자, 건강보험을 강화하겠다는 '문재인케어'에도 정면 배치된다는 점에서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형준 정책국장은 "공공데이터인 건보 정보를 획득해 보험료를 깎아주겠다는 건데, 지난 2011년과 2012년 두 번이나 국회에 상정됐다가 폐기된 '건강서비스법안'과 동일한 내용으로 민간보험사의 사활이 걸린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민영화를 통해 의료를 '비용 절감' 차원에서 접근하는 미국에만 있는 상품일 뿐, 공적보험을 가진 나라에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제도란 것이다.
정 국장은 "이명박·박근혜정부의 가장 큰 적폐는 사실 규제를 계속 완화한 것으로 세월호 참사가 대표적"이라며 "산업화론자들이 내세운 4차산업혁명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것도 아닌데 공적 기준을 다 파기하면서 따라가겠다는 건 적폐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정형준 국장 역시 "문재인정부의 모든 기조에 완전히 모순되는 내용임에도 무차별적으로 합의도 없이 진행하는 건 무척 우려스럽다"며 "참여정부 당시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사태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사전 규제'가 사라질수록 '사후 묵념'은 갈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규제는 원수이자 암덩어리"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철학이 아니라 "늑장대응보다 과잉대응이 낫다"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가치에 한층 힘이 실려야 한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문 대통령 스스로도 "정부가 하는 모든 일의 시작"이라고 강조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음은 물론이다.
환경운동연합 맹지연 국장은 "규제는 포괄적으로 완화할 게 아니라 꼭 필요한 경우에만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검토하는 게 맞다"며 "그마저도 사회적 의견 수렴과 입법을 통해 공정하게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스프링쿨러도, 타워크레인도, 샌드위치판넬도, 필로티도, 가습기 살균제도 지난 그 어느 시점에선 '신제품·신기술'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