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 형사3부(부장판사 조영철)는 이날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조 전 장관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조 전 장관이 "좌파에 대한 보조금 지급이 이뤄지지 않게 하는 정무수석실의 업무를 인식하고 그에 관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사실이 인정된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 문화계 블랙리스트, 실제 불이익 여부와 상관 없이 '검토, 논의'가 범죄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해당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단체나 인사에 대해 실제 불이익을 가했는지 여부와 상관 없이 명단을 '작성'하는 데 관여했다는 점이 유죄로 인정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재판부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이런 검토, 논의"를 두고 죄를 물었다.
이같은 법 논리를 '사법부 블랙리스트'에 적용하면, 이 역시 자체 조사 수준에서 끝낼 게 아니라 정식 수사에 돌입하고 재판부 판단까지 받아야 한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범행의 내용이 꼭 닮았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간 측면까지 있기 때문이다.
전날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발표한 '사법부 블랙리스트' 조사 결과를 보면, 양승태 대법원이 조직적으로 일선 판사들을 뒷조사한 정황이 확인된다. 2016년 8월24일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이 작성했다는 '각급 법원 주기적 점검 방안' 문건이 대표적이다.
◇ 예술인 못지 않게 법관 동향파악·분류하고, 불이익 없으니 마무리하자?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이 추진하는 사안에 비판적 목소리를 낸 법관들을 추려 특정 연구회 회원 여부, 정치적 성향을 비롯해 법원 내부 통신망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글까지 파악해 문건을 작성했다. 핵심그룹과 주변그룹까지 나누는 등 문화계 블랙리스트 못지 않은 사찰 항목을 완성했다.
법관의 동향 파악은 확인되지만 인사상 불이익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으니 조사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는 대목이다. 이런 문건의 작성 자체만으로 위법성이 구성된다는 점이 조 전 장관의 이날 판결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찰 대상은 삼권분립의 한 축인 사법부다.
실제 인사상 불이익 여부도 더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 확인조차 하지 못한 파일 760건 가운데는 진보 성향의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인사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문건이 있다.
게다가 상당수 파일은 이미 지워졌다는 점에서 증거인멸 혐의도 피하기 어렵다. 조사위는 법원행정처 관계자들이 사용했던 업무용 컴퓨터의 저장 장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삭제된 파일이 적어도 300개 이상 발견됐다고 밝힌 바 있다. '박모 판사 동향 파악'이라는 제목의 문서 파일처럼, 제목은 남아 있지만 삭제된 바람에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컴퓨터 3대 털었을 뿐인데…증거인멸, 직권남용,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이런 문건을 만드는 작업에 행정처 직원들이 동원됐다는 점에서, 해당 지시를 한 사람에 대해 직권남용 뿐 아니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까지 물을 수가 있다. 행정처 직원들은 '사상 초유의 일'에 해당하는 사찰 작업에 동원될 근거가 전혀 없다. 이 역시 문화부 공무원들이 동원된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닮은 꼴이다.
일선 법관들 사이에서는 컴퓨터 3대만 털어도 증거인멸과 직권남용, 직권남용권리행사 방해를 물을 만한 상황인데, 추가 조사를 할 경우 얼마나 많은 혐의가 추가될 것인지 궁금하다는 자조까지 나온다.
단순히 혐의가 짙다는 부분 말고도 정식 수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는, 해당 사건이 이대로 마무리될 경우 일선 법관들의 소신 판결에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 서울지역 부장판사는 "사법행정권을 이용해 사법부를 통제하려던 시도가 아무런 처벌 없이 넘어갈 경우, 나중에 같은 일이 발생해도 '예전에도 별일 아니었다'는 식으로 넘어가고 그 결과 불이익 가능성 때문에 판사들이 위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대법관 13명은 이날 법원 추가조사위원회 조사 결과와 관련해 간담회를 갖고 "재판에 관해 사법부 내·외부의 누구로부터 어떠한 연락도 받은 사실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