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 여자 단거리는 세계기록 왜 안 깨지나

인적자원 부족·약물복용 유혹 등…미국·자메이카 ''쌍끌이''에 탄력

''인간 탄환'' 우사인 볼트(22·자메이카)는 베이징 올림픽 남자 육상 단거리 100m, 200m, 400m계주에서 모두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해 세계 육상 역사를 다시 썼다. 볼트의 100m 결승전은 ''로이터통신''이 선정한 ''베이징 올림픽 최고의 순간''에 꼽혔다. 그만큼 강렬했다.

남자 육상 100m 세계기록 경신 주기는 점점 짧아지는 추세다.

육상 100m 세계기록을 처음 측정한 1912년에는 10초6(도널드 리핀코트, 미국)이었다. 미국의 짐 하인스(68년, 9초95)가 10초 벽을 깨는 데는 56년이 걸렸다. 그러나 칼 루이스(미국, 9초86)는 23년 뒤인 91년 9초8대에 처음 진입했고, 모리스 그린(미국, 9초79)은 9년 만인 99년 9초7대를 뛰었다. 베이징 올림픽에선 9초7벽마저 무너졌다. 최소 20년간 깨기 힘들 것이라는 마이클 존슨의 200m 세계기록(96년, 19초32)도 볼트에 의해 12년 만에 바뀌었다.

그러나 여자 단거리는 정반대다.

여자 육상 100m(10초49), 200m(21초34) 세계기록은 20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서울올림픽 단거리 3관왕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미국, 98년 사망)가 88년에 세운 세계기록에서 오히려 후퇴했다.

베이징 올림픽 여자 육상 100m, 200m를 석권한 자메이카 선수들의 기록도 조이너의 세계기록에는 한참 못 미쳤다. 100m 금메달 셸리 안 프레이저의 기록은 10초78. 올림픽 200m를 2연패한 베로니카 캠벨 브라운도 200m에서 21초74에 그쳤다. 두 선수 모두 올시즌 최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지만 조이너의 세계기록엔 각각 0.29초, 0.40초 뒤졌다.

그렇다면 여자 육상 단거리는 왜 세계기록이 안 깨질까.

◈ 부족한 인적자원-기록 향상도 더뎌

여자 단거리는 남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수층이 얕다. 선수층이 두터운 남자 단거리는 우사인 볼트 같은 ''뉴 페이스''가 끊임없이 등장하기 때문에 기록이 꾸준히 단축된다.

남자 육상 100m 세계기록은 1968년 9초9대에 처음 진입한 이후 12번 바뀌었다. 아사파 파월, 타이슨 게이 등은 볼트를 견제할 대항마로 손색이 없다. 볼트의 폭발적인 질주는 다른 선수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레이스의 전반적인 페이스를 한 단계 끌어올려줄 것으로 기대된다.


반면 여자는 항상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메달을 따는 선수는 몇 년째 정해져 있다. 기록 향상도 더디다. 2000년 이후 100m 시즌 최고기록은 10초7~80대에 머물러 있다. 걸출한 스타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체육과학연구원 성봉주 박사는 "경쟁력 있는 선수가 많이 나오는 남자에 비해 여자는 선수 수급이 원활하지 못하다. 남자는 인적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그만큼 좋은 선수가 나올 확률이 높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 강렬한 약물의 유혹-숱한 스타 스러져

매리언 존스, 카트린 크라베, 켈리 화이트….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한때 세계를 호령한 여자 스프린터지만 약물 복용으로 스러졌다는 것.

매리언 존스(미국)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금3, 동 2개를 휩쓸었다. 하지만 금지약물인 스테이로드제 복용이 발각돼 기록과 메달을 모두 박탈당했고, 올해 3월 약물 복용 관련 위증죄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베이징 올림픽을 교도소에서 지켜봐야 했다.

91년 세계선수권대회 100m, 200m를 석권한 카트린 크라베(독일)는 근육증강제인 ''클렌뷰테롤''을 복용해 자격정지를 당했다. 200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스프린트 더블''을 달성한 켈리 화이트(미국)도 금지약물 복용으로 출전정지와 메달 박탈 처분을 받았다. 부검을 통해 결백을 입증했지만 100m, 200m 세계기록 보유자 조이너도 생전에 약물 복용 의혹에 시달렸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근육량이 적고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약물 유혹에 더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다. 성봉주 박사는 "단거리 선수는 힘과 스피드를 겸비해야 한다. 여자 스프린터 같은 경우, 강한 근력을 얻기 위해 근육강화제를 오남용 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갈수록 엄격해지는 도핑테스트와 ''약물 스캔들''에 휘말리기 전까지 여자 단거리 최고스타로 군림한 매리언 존스의 극적인 추락이 약물 복용 억제에 기여할 것(뉴스위크 8월 6일자)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 독일의 몰락-미국의 독주

구동독(독일)은 미국과 함께 여자 단거리를 양분했다. 90년대 초반까지 여자 육상 단거리에서 초강세를 보였다.

베르벨 뵈켈(76, 80년 올림픽 200m 2연패), 실케 글래디시(87년 세계선수권대회 ''스프린트 더블''), 하이케 드렉슬러(88년 서울올림픽 100m, 200m 동메달), 카트린 크라베(91년 세계선수권대회 ''스프린트 더블'', 이상 독일) 등이 세계 여자 단거리를 지배했다.

하지만 구동독의 여자 단거리는 91년 독일이 통일되면서부터 급격히 몰락했다. 그후 미국 독주시대로 접어들었지만 라이벌이 없자 기록 향상은 더디기만 했다.

성봉주 박사는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유럽은 엄격한 통제 하에 스파르타식 훈련을 했고, 선수들의 강인한 정신력은 최고의 경기력으로 연결됐다. 그러나 즐기면서 하는 분위기로 바뀌면서 동유럽의 경기력이 저하됐고, 덩달아 세계 여자 단거리도 침체됐다"고 설명했다.

육상에서 20년 이상 깨지지 않는 기록(올림픽 세부종목 기준)은 모두 14개(남: 2개, 여: 12개)다. 이중 여자 100m, 200m, 7종경기를 제외한 11개 종목의 세계기록은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이 갖고 있다. 투척, 도약 등 필드에선 지금도 동유럽이 강세다. 그러나 많은 세부종목에서 세계기록과의 격차는 여전하다.

◈ 여자 단거리 세계기록 경신은 시간문제

여자 100m, 200m 세계기록은 20년째 답보상태다. 하지만 여자 단거리의 미래는 밝다. 앞으로 미국과 자메이카가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면 기록 향상 속도는 훨씬 빨라질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을 제치고 스프린터 왕국으로 거듭난 자메이카는 베이징 올림픽 육상에서만 금6, 은3, 동1개를 땄다. 남녀 100m, 200m를 휩쓴 가운데 여자 100m에선 금메달과 공동 은메달을 싹쓸이했다.

자메이카의 선전은 단순히 돌풍으로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자메이카 선수들은 태어날 때부터 단거리 달리기에 유리한 ''액티넨 A''라는 특수유전자를 갖고 있다. 선천적인 재능 외에 자메이카 공대의 과학적인 훈련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는다. 동기부여도 확실하다. 인구 260만명에 국내 총생산(GDP) 116억달러에 불과한 카리브해의 소국 자메이카. 달리기는 이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베이징 올림픽 육상 단거리에서 참패한 미국도 대수술에 들어갈 방침이다. 미국은 84년 LA올림픽 이후 남녀 단거리 100m, 200m에서 나온 24개의 금메달 중 17개를 딴 육상 강국. 이번에 단거리에서 노골드에 그친 만큼 대혁신을 예고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육상연맹 덕 로건 전무는 "올림픽 후 경기력과 훈련프로그램을 종합적으로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미국과 자메이카, 두 나라 간 경쟁에 스포츠과학의 힘이 보태진다면 여자 단거리에서 세계기록을 깨는 것은 시간문제다. 기록은 깨라고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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