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 "미안하다"…'1987' 6월항쟁 숨은 주역의 눈물
② "박정희 죽고 TV에 뜬 전두환, 싸움 직감했다"
③ "문재인 정부 실패하면 또 다른 MB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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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9월 반독재 시위 도중 붙잡혀 서울구치소로 넘겨졌는데, 그 안에서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죠. 저는 12월 9일 긴급조치가 해제되면서 석방됐어요. 대학 생활 내내 온통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를 어떻게 깰 것인가'만 생각해 온 입장에서, 박정희의 죽음은 한국 사회의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으로 다가왔죠."
그는 "박정희의 죽음은 1980년 새해를 앞두고 (민주화에)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며 "그런데 12월 12일 군사쿠데타가 터지고, 전두환이 TV 화면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다음 번에는 저 친구와 싸우게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복학 조치가 이뤄져 학교에 돌아왔는데, 학내에서는 '빨리 신군부와의 싸움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와 '학내 역량을 키우면서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이었어요. 그렇게 1980년 5월을 넘기면서 자연스레 학생들이 거리에 나섰고, 전두환 정권과의 싸움이 벌어졌죠."
당시 이 씨는 복학생으로서 학내 민주화운동을 진두지휘하며 정권의 표적이 됐고,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의 비상계엄령이 확대되면서 그날 밤 집으로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붙잡혀 갔다.
"그날부터 50일가량 영장 없이 불법 감금됐고, 이후 영장이 나와 구치소로 넘겨져 군사재판 1심에서 3년을 구형 받았어요. 저는 앞서 1979년 수감생활이 6개월을 넘기지 못했기 때문에 군대에 강제로 보내졌는데, 강원도 원통에서 3년을 보낸 뒤 1983년 5월에 제대를 했죠."
그는 1980년 5월 17일 경찰에 붙잡히고 나서 며칠이 지난 뒤, 광주에서 벌어진 신군부의 만행을 전해들었다고 했다. 바로 5·18민주화운동이었다.
"저는 일찍 연행됐지만, 5월 24일 이후에는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려는 유인물 등을 돌리다가 붙잡혀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들을 통해 구치소에서 광주 소식을 듣고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죠."
◇ "1980년의 좌절과 실패에 관한 수많은 고민들…뼈아픈 반성"
"1980년 당시 싸움은 그야말로 학생들로 국한된 상황이었어요. 그 힘만으로 신군부에 맞서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했죠. 한 지역에만 고립될 경우에도 정권의 물리적 탄압이 집중될 테니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판단과 함께였어요."
특히 그는 "당대 미국에 대한 우리의 안이한 인식과 판단에 통분했다"고 말했다. '민주 세력이 신군부와 어지간히 맞서면 미국이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었다.
"1980년 5·18 당시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되는 등 모든 과정에서 미국의 용인과 묵인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미국은 자기네 이익에 봉사하는 세력이면, 그것이 독재든 뭐든 상관없이 그 세력을 이용해 먹었던 거죠. 나라가 남북으로 갈린 상황에서 이상할 정도로 비대해진 군부 엘리트들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분단 문제도 부각될 수밖에 없었죠."
이 씨는 "민주화 세력 안에서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1980년을 거치면서 1983년까지 이어지는 흐름이었다"며 "1981년과 82년은 신군부의 위세에 감히 대적하지 못하던, 굉장히 위축되고 짓눌려 있던 상황이 지속됐다"고 진단했다.
"간혹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등 단발적인 저항은 있었지만, 그것이 커다란 사회적 흐름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어요. 제가 제대할 무렵이던 1983년 5월에 YS(고 김영삼 전 대통령)가 광주항쟁 3주기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미국 체류 중이던 DJ(고 김대중 전 대통령)가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상황들이 이어지면서 재야 민주 세력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는 "그렇게 재야 정치인들은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으로 묶였다. 민주화 세력 안에서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움직임이 1983년 하반기부터 일기 시작했고, 그 결실로 그해 9월 김근태 선배를 의장으로 하는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만들어진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저는 1984년 민청련에 합류해 집행간부로 활동을 시작했어요. 학원자율화 조치 등이 이뤄진 1983년 말에서 1984년 초까지 소위 정권의 '유화' 국면이 지속되면서 민청련 활동도 어느 정도 허용됩니다. 1984년에는 노동자·문화예술인 등의 단체가 속속 만들어졌는데, 이들 단체와 민청련, 기독교권이 힘을 모아 연합단체인 민민협(민중민주운동협의회)을 세웠죠. 민민협에 참여하지 않았던 재야 인사들은 국민회의(민주통일국민회의)를 별도로 만들어 조직적인 활동에 나섭니다."
◇ "2·12총선으로 정권 심판한 민심과의 적극적인 결합 급물살"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전국 조직으로서 체계를 갖추던 가톨릭농민회 등이 중앙 조직의 통일을 강력하게 요구했어요. 1984년 11월부터 통합 논의가 시작됐고, 합의가 잘 안 돼 민청련과 기독교권은 참여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듬해인 1985년 3월 민통련이 출범합니다. 민청련 소속이던 저는 그 과정에서 재야 운동권 선배들의 요청에 따라 내부 논의 구조를 거쳐 민통련 실무자로 옮겼죠."
그는 이 시기 전두환 정권이 폭압적인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유화 정책을 쓴 데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젠 다소 풀어줘도 체제가 뒤집어질 정도는 아니'라는 심산이었던 거죠.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2년을 보내면서 경제도 살아나는 등 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자신감 말이죠. 더욱이 1987년 권력 교체 국면과 이듬해 88올림픽이 예정된 상황에서 폭압 정치로 일관해서는 안정적인 체제 유지가 어렵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1985년 2월 12일 치러진 12대 총선을 기점으로 유화 정책을 접고 다시 폭압적인 태도를 취한다. 민추협을 모태로 둔 야당인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단적으로 드러난 까닭이다.
"2·12총선을 거치면서 민주화 세력 역시 깜짝 놀랐죠. 그 전까지는 신군부 세력 내지는 전두환 세력이 존재하고, 이에 저항하는 소수의 민주화 세력이 있고, 나머지는 의식 없는 대중들이 있다고 여겨 온 게 사실입니다. 당시 총선을 통해 그렇지 않았다는 게 드러난 거죠. 많은 국민들이 전두환 정권에 대해 엄청난 분노와 저항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총선으로 폭발한 셈입니다."
이 씨는 "당시 민주화 세력은 한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을 두 명씩 뽑던, 전두환 체제 유지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선거제도에 냉소적이었다"며 "그런데 2·12총선에 나선 신민당 후보의 종로 유세 현장에만 10만 군중이 운집하는 것을 보면서, 총선 판이 열리자 대중들이 물밀듯이 나오는 것을 접하면서 '잘못 판단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고 전했다.
"그렇게 당초 무게가 실리던 '선거 무용론'은 대중과 적극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선거활용론'으로 방향을 틉니다. 이러다가는 대중의 정치사회적 인식에 오히려 뒤쳐질 수 있다는 자성이 일면서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통합 논의도 급물살을 탔죠. 결국 1985년은 전두환 정권과의 본격적인 싸움이 전국으로 번지고 고조되는 변곡점이었죠."
◇ 87년 1월, 급기야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다
1985년 전두환 정권의 민청련 탄압 사건으로 유화 국면은 끝이 났고, 이듬해인 1986년 말까지 정권의 극단적인 탄압은 줄기차게 이어졌다. "그 정점이 바로 1986년 5·3인천사태였다"는 것이 이 씨의 설명이다.
"1985년 말에서 1986년으로 접어들면서 정치권은 물론 재야 모든 세력은 직선제 개헌을 위한 싸움에 돌입합니다. 1987년 대선에서는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자는 거였죠. 1986년 3월부터 전국을 돌며 신민당 개헌 현판식을 치렀는데, 광주에서만 30만 인파가 쏟아져 나왔어요. 그렇게 5월 3일 예정된 인천 현판식에 모든 조직 역량을 집중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는 "수도권의 모든 운동 역량이 인천에 집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은 인천에서 함정을 파놓고 기다렸다"며 "정권은 폭력성을 부각시키면서 구심점으로 민통련을 지목했고, 앞서 1985년 민청련에 이어 1986년 민통련을 탄압하면서 70~80명이 수배·구속됐다"고 전했다.
"제 경우 그해 3월 감옥에 갔다가 7월에 밖으로 나와 5·3인천사태의 탄압을 피해갈 수 있었어요. 당시 저는 민통련 조직국장으로서 수도권 청년·학생·노동·문화 운동 조직화와 더불어, 지역운동협의회 간사로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관리했습니다. 자연스레 지속성을 갖다보니 제게 일이 집중됐고, 1987년 6월항쟁에서 본래 역할을 다할 수 있었죠."
이 씨의 표현을 오롯이 빌리면 "당시 위기의식이 고조됨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측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야의 숨통을 옭아매면서, 자기네 정치 스케줄대로 가기 위한 극단적인 행태를 서슴지 않았다".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은 1986년 말까지 모든 것을 정리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극단적인 폭압 정치로 내달립니다. 자고 일어나면 고문·용공조작 사건이 한 건씩 터졌으니까요. 그해 10·28 건대사태, 민통련 사무실 문을 용접해 버린 강제폐쇄는 각각 학생운동과 재야사회운동 탄압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극에 달하는 과정에서 급기야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기에 이른다.
그는 "박종철 열사 사건이 터지고, 저놈들(전두환 정권)과 우리 둘 중 하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막판 승부로 간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며 "저놈들이 해서는 안 될 극악무도한 짓까지 벌이고 있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나의 '1987' ③]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