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한국 미워'…돌아간 이주노동자 증오 안다면"

[노컷 인터뷰] '대한민국 인권상' 이정호 신부 "누구나 사람이다"

지난달 28일 서울 목동 CBS사옥에서 이정호 신부가 CBS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노컷뉴스)
이정호(62) 성공회 신부는 올해로 29년째 경기 남양주시 마석에서 한센인들,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성공회 신부는 보통 4, 5년에 한 번씩 다른 데로 옮기는데, 저는 1990년 6월 1일 부임해 주교가 4번 바뀌는 동안 이곳에만 있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지난달 28일 서울 목동에 있는 CBS사옥에서 만난 이정호 신부는 '이주노동자들의 대부'라는 자신의 별칭을 두고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로마 가톨릭(천주교)에서 신부를 '파더'(Father)라고 하는데, 이를 한국말로 직역하면 '대부'예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저를 그렇게 부르면서 붙여진 거죠. 제가 아버지 역할을 하는 건 아니니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요. (웃음) '대부'보다는, 지금은 은퇴한 어느 출입국관리소장이 붙여준 '외국인 노동자 앞잡이'가 더 나아요, 하하."

그가 있는 마석 땅은 1960년대 초반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정착마을을 짓기 위해 당시 영국 성공회 선교사가 땅을 매입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제가 처음 왔을 때 한센인 40여 명이 우리 교회 소속이었어요. 그분들은 이곳에서 주로 축산업을 하셨는데, 나이 들고 노동력도 떨어지고 규제도 많아지면서 운영이 어려워졌죠. 그때 외부 사람들이 들어와서 '우리에게 땅을 빌려주면 공장으로 개조해 쓰면서 임대료를 주겠다'고 해 가구공장단지로 빠르게 탈바꿈했어요."

이 신부는 "그렇게 이곳에 가구 만드는 아주 영세한 공장들이 들어섰고 외국인 노동자들도 들어왔는데, 대부분이 불법체류자였다"며 "그들은 축사가 있던 자리에 날림으로 지은 무허가 건물을 기숙사처럼 사용하는 등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했다"고 설명했다.

"먼저 터를 잡고 있던 한센인들이 이주노동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죠. 그분들이 임대주인 만큼, (이주노동자들에게) 월급 안 주는 공장이 있다는 걸 알면 찾아가서 '왜 월급 안 주냐'고 따지곤 했어요. 그분들이 한센인으로서 워낙에 서럽게 살아 오신 만큼,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그 아픔이 얼마나 큰지 공감할 수 있었던 거죠."

◇ "그들은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도 병원에 못 가고 숙소에 숨는다"


이정호 신부(사진=윤창원 기자/노컷뉴스)
이정호 신부는 지난달 8일 '2017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 동백장의 주인공이 됐다. 그간 한센인·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 신장에 애써 온 노고를 인정받은 덕이다.

그는 "내가 받을 상이 아니"라며 "다른 훌륭한 인권운동가들이 받아야 할 상을 가로챈 느낌이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 상은 결국 저를 도와준 사람들 덕분에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강남 어느 곳에 훈장을 가져다 주면 멋진 케이스에 넣어 준다는데, 제일 싼 게 20만 원이라더군요. '그 돈 주고 할 생각 없다' '그냥 벽에 못 박아서 걸어둔다'고 했죠. (웃음)"

이 신부는 "성서보다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컸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한센인들이 들려 주시는, 소록도에서 나와 살아 온 이야기를 접하면서 커다란 아픔을 공감했어요. 몸이 아픈 이주노동자들 병원에 데려가고, 그들을 잡아가려고 갑자기 들이닥친 단속반과 멱살잡고 싸우기도 하는 등 감당하기 힘든 순간이 참 많았죠. 그러던 중 밖에서 연대하는 모임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렇게 천주교, 원불교 등 여타 종교단체와 연대해 법무부·경찰청 앞에서 시위하면서 길거리 투사, 욕쟁이 신부가 돼 버렸네요."

"사정상 불법 체류가 대부분인 이곳의 이주노동자들은 일하면서도 누가 잡으러 올까봐 불안해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거리에서 교통사고가 나 크게 다쳐도 병원이 아니라, '잡혀가지 않을까'라는 걱정에 숙소 등으로 숨는다"는 것이다.

"일하다가 다치는 일이 다반사인데, 그러한 어려움을 어떤 형태로든 풀어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뿐이었죠.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은 여전히 열악합니다. 속된 표현으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짜고 치려면 세 놈이 한 놈을 해 먹어야 할 텐데, 정부와 고용주 그리고 그 주변이 서로 짠 뒤, 돈 벌기 위해 한국에 온 가난한 이주노동자들을 등쳐먹고 있는 셈이죠. 단지 피부색,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말이죠."

그는 "그동안 '누군가는 이주노동자들의 편을 들어주는 일, 그들의 체류에 당위성을 부여해 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며 "성서의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피부에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제 가족이 모두 미국,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어요. 부모님께 다녀오거나 형제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 이주민의 삶이 엄청나게 고달프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죠. 더욱이 불법 체류하는 이주노동자들의 경우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잖아요. 우리는 그 고통에 너무도 무관심합니다."

◇ "우리는 '사람'을 부른 것이지, 기계를 들인 게 아니다"

이정호 신부(사진=윤창원 기자/노컷뉴스)
매순간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같은 시간을 거쳐 온 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는 결국 부메랑을 맞게 될 거란 생각에 손을 놓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이주노동자들, 손발 등이 다쳐 강제추방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지난 2016년 학생 등 35명과 함께 '청소년, 다문화에 말을 걸다'라는 주제로 방글라데시를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 일했던 청년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가 그러더군요. '신부님, 나 한국 미워'라고요. 한국을 증오하고 있었어요."

이 신부는 "한국을 경험하고 돌아간 사람들이 겪게 되는 트라우마와 고통들, 고향에 돌아갔지만 한국에서 입은 신체적인 재해로 죽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다"며 "우리는 단지 '추방했다' '고향에 돌려보냈다'는 것으로 책임을 떠넘기기 바쁘다. 그들이 유엔에 한국의 이주노동자 인권에 대해 항의하는 것보다, 자기 동네에서 한국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전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침해 사례는 처참했다. "한 번은 추방되는 이주노동자의 마지막 월급을 정리하기 위해 사장에게 데려갔는데, 사장이 '내가 월급 안 준다고 그랬어!'라고 소리치고 욕하며 손찌검을 하더군요. 결국 그 사장과 멱살잡이까지 하며 싸웠죠. 또 한 번은 떠든다는 이유로 이주노동자를 때려 귀가 떨어져 나간 것도 봤어요. 그 노동자는 치료 받고 고향으로 갔는데, 20일 동안 짐도 정리 안하고 우리 보호소에 숨어 있다가 돌아갔어요."

결국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간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마저 착취하고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 이 신부의 지적이다.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 풀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코이카니 뭐니 하면서 여러 일을 벌이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있어요. 이제는 저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그는 오는 9일 다시 한번 학생들과 함께 방글라데시를 찾는다. 앞선 방문 당시 KBFS(코리아-방글라데시 프렌드십 소사이어티)라는 친교단체를 만들었는데, 마석에서 일했던 이주노동자를 센터장, 상담실장, 한국어교육실장으로 고용해 한국을 경험했던 이주노동자들의 어려움을 들어주는 곳이다. 이곳의 활성화 점검도 이번 방문의 큰 목적이다.

이 신부는 "상담을 통해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돈이든 물건이든 지원을 해주는 것"이라며 "한국에 대한 나쁜 기억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기 위함"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기 꺼리는 일들을 고맙게도 그들이 대신 해 주고 있는 것"이라며 "이주노동자들이 잘 살면 한국인들은 훨씬 더 잘 산다는 것을 빨리 깨우쳤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서로 다른 것을 존중하고,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언어·나라·피부색이 다르더라도 그들 역시 우리와 동등하다는 인식이 절실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부른 것이지, 기계를 들인 게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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