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한국 야구는 어떤 면에서는 화려했다. KBO 리그에서 이대호가 친정팀 롯데로 복귀하면서 4년 150억 원 시대를 열어젖혔고, '호랑이 군단' KIA는 전반기 엄청난 기세를 보이며 후반기 약진한 롯데와 함께 흥행을 쌍끌이했다. 역대 최다인 840만688명 관중 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829만2687명을 훌쩍 넘어섰다.
하지만 세계 야구를 호령했던 한국의 위상은 흔들렸다. 지난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2회 연속 2라운드 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셨다. 부푼 꿈을 안고 메이저리그(MLB)로 진출했던 국가대표 선수들은 하나둘 짐을 싸고 씁쓸하게 귀국했다. 그런 그들에게 구단들은 100억 원 안팎의 돈다발을 안기며 '거품' 논란이 커졌다.
실패를 맛보고 돌아온 해외파들의 거액 계약은 KBO 리그가 '속 빈 강정'이 아니냐는 비판을 키웠다. 더 이상 세계 무대에서 통하지 않는 한국 야구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된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2006년 WBC 4강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09년 WBC 준우승 이후 근 10년, 화려했던 한국 야구는 이제 실했던 알맹이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엄청나고 화려했던 숫자들의 향연
2017년 숫자로만 보면 한국 야구는 엄청났다. 우선 KBO 리그에 선수 몸값 100억 원 시대가 공식적으로 개막했다.
비록 지난해 맺었지만 엄연히 2017시즌부터인 최형우(KIA)의 계약이 'FA(자유계약선수) 100억 원' 시대를 알렸다. 같이 삼성에서 FA 자격을 얻은 차우찬도 친정팀으로부터 4년 100억 원을 제시받았지만 LG와 95억 원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더니 올해 1월 일본과 MLB 도전을 마치고 돌아온 이대호가 4년 150억 원의 역대 최고액을 찍은 것이다.
이제 리그 정상급 선수들의 몸값은 기본 100억 원이라는 게 정설이다. 올 시즌 뒤 성사된 주요 선수들의 계약이 그렇다. 역시 미국 도전을 끝낸 황재균(kt)과 김현수(LG)가 각각 4년 88억 원, 115억 원에 계약했다.
MLB 대신 친정팀 잔류를 선언한 손아섭(롯데)도 98억 원에 도장을 찍었다. 발표액은 100억 원이 아니어도 옵션 등 실제 규모는 100억 원이 넘는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28일 연봉 23억 원에 계약한 양현종(KIA)도 계약금과 옵션 등 4년으로 환산하면 100억 원이 훌쩍 넘어간다.
고액 연봉자들의 홍수 속에 KBO 리그 관중도 크게 늘며 '국민 스포츠'의 인기를 확인했다. 올해는 전국구 인기팀 KIA와 롯데가 흥행몰이하며 840만 관중 시대를 이끌었다. 두 팀이 여전히 강팀으로 분류되고 박병호(넥센) 등 해외파들이 복귀하는 내년은 850만 관중 돌파도 바라본다.
각 구단들의 흥행 기록도 이어졌다. KIA, 롯데의 서울 팬들을 흡수한 LG는 8년 연속이자 프로 스포츠 사상 첫 12번째 100만 관중을 돌파했다. 두산 역시 사상 최초 9년 연속, KIA는 팀 창단 최초, 롯데가 5년 만에 100만 관중 기록을 달성했다.
▲숫자의 거품 드러났던 '아픔의 WBC'
하지만 화려한 숫자들의 이면은 밝지만은 않았다. 천문학적인 몸값의 선수들이 총출동한 국가대표팀이 안방에서 충격적인 WBC 2회전 진출 실패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화끈한 공격 야구를 위해 스트라이크존을 좁히면서 얻은 엄청난 타격 기록은 그야말로 '빈 수레가 요란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웠다.
지난 3월 한국 야구 대표팀은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WBC 1라운드에 나섰다. 4회를 맞는 WBC에서 처음으로 안방에서 열린 대회. 2015년 프리미어12 우승의 기운을 몰아 2013년 WBC 2회전 탈락의 아쉬움을 씻기 위해 의욕적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대표팀은 이스라엘에 이어 네덜란드에도 덜미를 잡혔다. 최약체라던 이스라엘에 1-2, 연장 패배를 안은 데 이어 네덜란드에 0-5 완패를 안았다. 지난해 리그 평균 타율은 2할9푼의 불방망이는 MLB식 스트라이크존에 침묵했다. 결국 안방에서 WBC 2회전 탈락의 수모를 안아야 했다.
다분히 인위적으로 조성된 KBO 리그의 공격 야구는 국제무대에서 무용지물이 됐다. 때문에 올해 존 확대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고, 실제로 초반 달라진 존이 적용되기도 했다. 올해 리그 타율은 2할8푼6리, ERA는 4.97. 소폭 조정됐지만 MLB와 일본에 비하면 여전히 기형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이렇게 되면 KBO 리그 타자들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화려한 스탯을 안고 MLB로 진출했던 타자들이 속속 돌아오는 이유다. 물론 강정호(피츠버그), 에릭 테임즈(밀워키) 등 성공한 타자도 있지만 박병호, 황재균, 김현수 등 KBO 정상급 타자들이 실패한 뒤 복귀했다. 향후 한국 선수들의 MLB 도전이 뜸해질 가능성이 높다.
▲'KBO 정운찬 시대' 성장 속 내실 다질까
화려한 숫자에 가려진 그늘은 또 있다. FA 시장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하면서 어느 사회나 바탕이 될 중간층의 위기가 왔다. 건강한 리그가 되려면 선수층이 탄탄해야 하지만 현재 KBO 리그는 고액 연봉자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올해 스토브리그에서는 대어급 선수들의 계약이 줄을 이었지만 채태인(넥센) 등 준척급 FA는 좀처럼 도장을 찍지 못하고 있다. 최준석(롯데), 이대형(kt) 등 적잖은 나이의 FA 재취득 선수까지 보상 선수 규정에 묶여 운신의 폭이 좁다는 지적이다. FA 등급제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제 KBO는 구본능 총재가 떠나고 새 수장인 정운찬 시대가 시작된다. 정 총재는 내년 1월 3일 공식 취임해 3년 임기에 들어간다. 구 총재 시절의 KBO가 외형적 성장을 이뤄냈다면 정 총재에게 주어진 역할은 내실까지 다지는 것일 터.
하지만 이후 1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이들도 은퇴하거나 선수 생활의 후반기에 접어들었다. 이대호, 강민호, 류현진, 김광현 등은 여전히 전성기가 남아 있지만 이승엽과 정대현이 은퇴했다. 이제 서서히 바통을 후배들에게 넘기고 멋진 마무리를 준비해야 할 선수들이 적잖다.
내실을 다져 재도약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은 있다. 선동열호가 출범한 가운데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2017'에서 젊은 선수들이 KBO 리그의 핵심이 될 가능성을 보였다. 여기에 베이징 세대를 보고 자란 '베이징 키즈'가 이제 서서히 KBO 리그와 대표팀에서 활약한다. 올해 신인왕 이정후(넥센)를 비롯해 내년 강백호(kt), 안우진(넥센), 곽빈(두산) 등 걸출한 신인들이 등장한다.
엄청나고 화려한 숫자들로 점철됐던 2017년 한국 야구. 그러나 그 이면에 짙은 그늘 속 공허함은 내실에 대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과연 내년 이맘때 2018년 한국 야구를 결산하는 기사는 명실상부의 주제로 쓰여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