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민은 '즉답'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들어오는 질문의 의미를 곱씹고 나서야 입을 떼는 경우가 많았다. 조금 낮은, 듣기 편한 목소리로 생각을 꺼낼 때 귀를 더 쫑긋 하게 된 것은 남다른 표현력 덕분이었다.
'표현력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가 요즘 재미를 붙인 취미가 바로 '책읽기'란다. 딱 맞춤한 듯이. 장강명 작가의 장편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너무나 재밌게 읽어서 다른 작품인 '표백'을 읽을 생각이라는 그와, 뜻밖의 '책 이야기'를 신나게 나눴다.
(노컷 인터뷰 ① '이번 생은' 정소민 "미움 받을 용기 낸 지호는 멋진 사람")
◇ 요즘 책읽기에 빠져… 재밌게 본 작품은 '한국이 싫어서'
인터뷰는 드라마가 끝난 지 2주 정도 지난 시점에 이루어졌다. 요즘 뭘 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걸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인지 묻자 책을 읽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루에 3편을 몰아볼 정도로 중독된 것처럼 영화만 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책'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읽을거리'와 가까운 드라마 보조 작가가 주인공이고, 혼자만의 노트에 옮겨두고 싶은 구절이 자주 나왔기에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독서 권장 드라마'라는 별명이 붙은 바 있다.
정소민은 "누가 저희 드라마를 '독서 권장 드라마'라고 하더라. 제가 누구보다 (드라마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끝나자마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너무 좋더라"라고 말했다.
그는 "두 작품('아버지가 이상해', '이번 생은 처음이라') 연달아 촬영하면서 알게 모르게 제 안에서 빠져나가는 게 되게 많았는데 책을 보면서 채워나가기도 하고, 생각의 정리도 되어서 좋은 힐링 방법 같다"고 설명했다.
인터뷰 당시에는 하현의 독립출판물 '달의 조각'을 읽고 있다고 했다. '한국이 싫어서'의 느낌이 너무 강렬해 다음에는 장 작가의 다른 작품인 '표백'을 볼 예정이다. 정소민은 "마음의 소양을 쌓고 간접경험을 하는 것은 분명 (연기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정소민은 다른 사람의 추천이나 선물을 통해 책을 접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란다. 영화를 좋아하고 잘 아는 사람들이 추천하는 영화를 보게 되는데, 같은 듯 다른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무척 재밌다고 한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의 윤지호에게 어떤 책을 추천하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 그는 멋쩍게 웃으며 "지호에게는 제가 (책을) 추천받아야 할 것 같다. 책을 이미 너무 많이 읽었을 것 같아서"라고 전했다.
◇ 정소민이 말하는 '연기자'란 직업이 좋은 이유
요즘 책읽기 말고 관심사는 없을까. 어김없이 "책인 것 같다"는 수줍은 답이 나왔다. 재미있는 책을 한 권 보고 나면, 그 다음에는 뭘 읽을지 '즐거운 고민'을 한다.
어떤 강박이나 의무는 아니지만, 책읽기와 영화 보기는 연기에도 도움이 된다. 자기만의 스타일로 소화해 두면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받쳐주는 자산이 돼 있다. 인간 정소민의 성장과 연기자 정소민의 성장은 떼어놓고 볼 수 없다는 의미다.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여태까지 연기하면서 느꼈던 건, 사람의 성장과 연기자로서의 성장이 맞물리는 부분이 크다는 것이다. 제 가치관에 대해 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 자동적으로. 뭔가 감명 깊게 보고 나면 그걸 제 삶에 대입하게 된다든지.
연기할 때 도움이 되기도 하는 게, 제가 캐릭터를 만났을 때 제일 처음 하는 작업이 그 캐릭터와 제가 같은 점, 다른 점을 다 써 보는 것이다. 그러면 저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단순히 나와 다른 캐릭터를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캐릭터를 이해함으로써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걸 알게 돼 연기자라는 직업이 이런 점에서 너무 좋다는 걸 느낀다. 저도 몰랐던 저를 발견하게 되고. 그 작업이 너무 즐겁다."
그동안 만났던 배우들 중에서는 일기나 메모를 한다고 전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정소민은 그때그때 메모를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흘러가는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옛날'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 지금까지의 노력,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하는 '근육'으로 돌아와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 하반기까지 연달아 세 작품을 했고, 다행스럽게도 모두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바쁘고 보람 있는 한 해라고 자평해도 좋을 만큼. 정소민은 올 한 해를 어떤 해로 기억하고 있을까.
그는 지난해부터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많이 줄었다고 고백했다.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에는 다져놓은 근육(실력)이 없어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단다. '왜 이렇게 부족할까'에 대해 불안해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들인 노력이 제대로 돌아왔다. 자세는 똑같은데 결과가 왜 달랐을지 따져 보았다. 정소민이 내린 결론은 명쾌했다.
"사실 무슨 일을 하든 처음 시작하면 잘하기가 힘들다. 그동안 제가 해 왔던 노력이 이제야 제 근육이 돼서 좋아하는 일을 멈추면 안 되는구나 하는 걸 알려줬다. 사람마다 주기는 다르겠지만 제 경우에는 5~7년 정도가 걸리는 것 같다. 그 정도 하니 제가 하고 싶은 연기를 조금이나마 해낼 수 있었다."
정소민은 '벡스터', '웬디와 루시', '더 클럽', '블루 발렌타인',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 '우리도 사랑일까', '어떤 여자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등에 출연한 미셸 윌리엄스를 닮고 싶은 배우로 꼽았다.
"배우들이 나왔던 작품이 좋다거나 단순히 (캐릭터마다)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이런 걸 떠나서, 작품마다 색깔에 맞게 물들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느 작품 속에 들어가도 위화감이 없더라"라는 그의 말에서, 그가 잡은 배우로서의 방향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서른을 앞둔 정소민이 하고 싶은 연기는
정소민은 진한 멜로('나쁜 남자'), 시트콤('스탠바이'), 복수극('빅맨'), 재난극('디 데이'), 예능드라마('마음의 소리'), 하이틴 로맨스('장난스런 키스'), 가족극('아버지가 이상해') 등 여러 장르를 종횡 무진해 왔다. 지난해에는 KBS 드라마스페셜 '빨간 선생님'으로 단막극도 맛봤다.
도전적인 필모그래피라는 말에 정소민은 "사실 옛날에는 못하는 것만 골라 했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캐릭터만. (이걸 하면 연기가) 늘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상한 오기를 부렸다"고 웃음 지었다.
지금은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지만, 현장에서 '배우고 싶은' 생각은 여전하다. 무용하는 캐릭터를 더 늦기 전에 해 보고 싶다, 음악을 워낙 좋아해 음악 관련 작품을 하고 싶다, 하드한 액션을 하고 싶다 등 해 보고 싶은 것만 한 가득이다.
"'디 데이' 선택한 제일 큰 이유 중 하나가 그렇게까지 (여성 캐릭터가) 뛰어다니는 게 드물기 때문이다. 프레임에 갇히고 싶지 않다. 드라마라는 장르 자체가 대사 위주로 흘러가면 몸이 굳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 그런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많이 쓸 수밖에 없는 작품을 하고 싶은 갈망은 항상 있다."
정소민은 "(서른이) 불과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서 다시 보니, 그냥 '며칠 뒤의 나'가 있을 뿐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소소한 기대와 설렘은 있다.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고 재미있기도 하다. 여러 모로 무척 기대되는 서른"이라고 밝혔다.
영화 '아빠는 딸'까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무려 4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열일'한 만큼, 그는 잠시 쉬어가려고 한다. 차기작을 검토 중이지만 이른 시일 내에 들어가진 않을 거란다. '기대되는 서른'을 맞은 정소민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는 잠시 숨을 골라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