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C는 2015년 오바마 정부 시절 통과된 망 중립성 규제를 철회하고 광대역 통신 기업들이 트래픽을 유발시키는 웹사이트 또는 플랫폼 서비스에 대한 네트워크 이용을 차단하거나 지연시키는 것이 가능하도록 결정했다. 광대역 통신 회사를 통해 웹사이트나 서비스 별 유료로 초고속 인터넷을 차등 이용하는 것도 허용했다.
한마디로 인터넷 플랫폼 사업자에게 '통행세'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미국, 망 중립 폐지에 발칵…통신사 '활짝' 기술업계 '미소 반 우려 반'
아짓 파이(Ajit Pai) FCC 위원장은 "망 중립성 규제는 혁신을 저지하고 통신 사업자들이 광대역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확장하는 데 필요한 투자를 억제했다"며 "미국인들은 방문하려는 사이트와 서비스에 여전히 접근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망 중립성 지지자들은 망 이용에 관한 추가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신생 업체들은 빠르게 도태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넷플릭스,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자본력이 우수한 대기업들은 더 빠른 접속이 가능한 유료 인터넷 서비스 경쟁에 큰 부담이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높은 서비스 비용을 소비자들이 치뤄야 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소비자 선택의 폭이 늘어날 수는 있지만 과다한 데이터 사용자일수록 높은 이용 비용이 발생 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것이 금전적 비용이 될지, 과다한 광고노출이나 개인정보 제공이 될지는 분명하지 않다.
망 중립성 폐기에 반발하는 바이스미디어그룹의 IT계열 매체인 마더보드(Motherboard)는 아예 자체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지역사회 기반 무료 네트워크 공급에 나섰다.
이 운동을 이끄는 제이슨 쾨블러(Jason Koebler) 마더보드 편집장은 "공급망으로서의 인터넷은 자유롭고 개방적이어야 한다"면서 "망 중립성 폐기로 인해 통신사의 독점이 심화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 소도시나 저소득층 지역에선 더욱 그렇다"고 강조했다.
반면, 기술 대기업들은 FCC의 망 중립성 폐지에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그동안 망 중립성에 대한 지지를 천명해왔던 미국 IT업계를 선도하는 페이스북(Facebook), 아마존(Amazon), 넷플릭스(Netflix), 구글(Google)이 사실상 침묵한 것이다. 일견에는 이들 기업의 이름을 따 '팽(FANG) 당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뉴욕타임스는 "과거 대부분의 기술 회사들이 망 중립성 규제를 유지하는데 발벗고 나섰지만 이번 철회 조치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기술 대기업들이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 침묵하는 기술 대기업들…당장은 부담이지만 시장 지배력은 더 강화
미국 정보기술 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인터넷 비디오 스트리밍 플랫폼인 컴캐스트(Comcast)의 예를 들며 콘텐츠를 제공하는 업체에 전송 요금을 추가로 부과하는 식으로 넷플릭스와 구글, 유튜브는 추가 비용을 조달할 수 있으며 광대역 통신 회사가 선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유료형 웹페이지나 비디오 스트리밍 페이지가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의 기술 대기업은 미래의 경쟁자에게 진입장벽을 세움으로써 오히려 강력하고 훨씬 안전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일부 국가에서는 구글과 페이스북이 시장 지배력을 통해 특정 통신사와 이용자가 무료로 구글과 페이스북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계약을 맺기도 했다. 서비스 이용자들은 무료로 인터넷을 이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구글과 페이스북이 임대한 인터넷에 접속 하고 있는 것이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망 중립성 규정을 철회하기로 한 FCC의 결정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는 광대역 통신 사업자나 무선통신 사업자가 이용 가격을 올리거나 특정 서비스를 더 많이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등 사용자의 인터넷 경험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2011년 이후 망 중립성을 유지해오고 있는 국내의 경우 방송통신위원회가 최근 '유연한 자세'로 입방아에 올랐다. 이미 통신요금 인하 효과가 있다는 이유로 제로레이팅(플랫폼 사업자가 자사 서비스 이용자의 데이터 사용료를 면제해주는 제도) 도입에 찬성 입장을 밝힌 바 있으며 이효성 방통위원장이 사견임을 전제로 "과도한 트래픽을 유발하는 업체에 대해선 그에 상응하는 망사용 대가 지불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혀 망 중립성 규제에 변화가 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제로레이팅은 사용자의 경제적 부담을 플랫폼 사업자가 대신 줄여줄 수 있지만 사용자가 플랫폼이나 특정 네트워크에 종속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 무료 인터넷 독점하려는 글로벌 IT 기업들…국내 인터넷 기업들 '반발'
페이스북은 구글과 손잡고 급성장하는 아시아와 미국을 연결하는 장장 1만2800km 길이의 해저 광케이블을, 마이크로소프트와는 대서양을 잇는 고속 광케이블을 구축하고 있다. 이미 개발도상국 상공에 태양광 에너지를 전력으로 사용하는 최대형 드론 '아퀼라'를 띄워 초고속 인터넷 연결 신호를 쏘아주는 '인터넷닷오알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엘론 머스크 테슬라 및 우주개발업체 스페이스X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전 세계에 초고속 인터넷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4425개의 인공위성을 순차적으로 쏘아올리는 프로젝트를 FCC에 제출하기도 했다.
구글은 열기구 기반의 '프로젝트 룬'을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지역 오지까지 연결이 가능한 무료 와이파이 공급을 추진해왔다. 인공위성과 무인 드론 '타이탄' 프로젝트도 진행중이다.
전 세계를 단일망으로 묶는 초고속 인터넷 네트워크를 무료나 저렴한 비용으로 제공한다는 프로젝트는 일면 희망적이지만, 이 네트워크에 접속한 사용자의 데이터를 누가 가질 것인지와 의존성에 따른 부정적 문제가 뒤따르는 것을 우려하는 시선도 적지 않다.
결과적으로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물론, 미래 커넥티드카,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 모든 스마트 기기가 한 네트워크를 통해 서비스가 이루어질때 가지는 폭발력과 막대한 수익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이들 기업들이 일찌감치 주목한 것이다.
당장 네이버와 카카오를 비롯해 200여개 인터넷 기업들을 회원으로 두고 있는 한국인터넷기업협회(회장 한성숙 네이버 대표)는 17일 성명을 내고 "미국의 망 중립성 폐기는 자칫 미국을 넘어 망 중립성 원칙을 지지하는 전 세계 다른 국가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급격한 통신 정책 변경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4차 산업혁명의 근간을 훼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망 중립성 폐지가 인터넷 기업의 혁신과 스타트업의 도전 의지를 꺾어 생태계 전반을 위협하고 인터넷을 통한 표현의 자유와 평등권 등 기본적인 가치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일명 자사 서버 접속 트래픽 유발 분담금 형태로 통신사에 각각 연 700억원대, 350억원대의 망 사용료를 내고 있다. 물론 자율적인 협의 형태지만 망 중립성이 철회될 경우 이 부담은 천문학적인 비용으로 늘어날 수 있다.
인터넷전문가협회 성명에 대해 한 인터넷 전문가는 "참여·공유·개방이라는 인터넷의 기본 가치가 무너진다는 우려가 가장 크다"면서도 "당장 늘어날 망 사용료 외에도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글로벌 기술 대기업이 국내 시장에서 지배력을 확대 할 가능성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