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43세 간호사입니다. 나이 많은 간호사도 장기자랑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춤 한번 추고 그냥 다닐 수도 있지만 너무 수치스럽고 모욕감이 듭니다. 눈 질끈감고 한 번 창피하고 말자 생각도 했지만, 이러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간호사가 되었나 생각이 들어서…
#신입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막내라서 해야 하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서 내에 있는 마실 물을 매일 아침 새롭게 간다던가 하는 일이요. 그런데 그것만 하는 게 아니라 사장님과 식사를 하면 턱받이도 해드려야 합니다.
#명절에 자기네들 가족 여행 간다고 별장이 비니깐 닭 사료 줘라, 개 사료 줘라 합니다. 업무시간에 닭 사료 떨어졌으니 사오라고 시킵니다. 개인별장관리, 개인봉사활동, 운전기사까지 직원 몫입니다.
#병원 원장 아들 결혼식에 직원들 동원시켜서 안내, 주차안내, 화환관리, VIP 안내, 축의금 관리…심지어 결혼식 후 비용 정산하고 엑셀 출력하여 신혼집 가져다주라고까지 시켰습니다. 첫째아들 때도 그러더니 둘째아들 때는 전문예식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원, 배치돼서 봉사했습니다.
시민노동단체 직장갑질 119에 제보된 '갑질' 사례들이다. 11월 1일부터 30일까지 2021건, 하루에 평균 68건의 갑질 신고가 접수됐다. 5천 6백여 명이 오픈채팅방을 찾았고, 약 4만 번의 대화가 오고갔다.
직장갑질 119는 지난 한 달간의 활동을 기록하는 보도자료 '임금 떼이고 괴롭힘 당하는 직장인들의 절규'를 내고 30일간 접수된 '직장갑질' 사례를 유형별 정리·발표했다. 정부에 긴급 대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 '장기자랑 강요' 성심병원만의 문제 아냐…사회적 질타에 '눈치껏 취소' 분위기
한림성심병원의 선정적인 장기자랑 강요가 언론에 알려지고 공론화되자 성심병원뿐 아니라 다른 많은 병원의 간호사·직원들이 직장갑질119에 비슷한 장기자랑과 강요가 매년 이어지고 있다고 폭로했다.
제보자들에 따르면, 송년회 때 신규 간호사들에게 장기자랑을 개별 의사에 관계없이 강제하고 준비 등에 소요되는 시간의 추가 수당을 미지급하는 것은 물론, 입사한 지 10년 이상 되는 간호사들에게도 팀을 만들어 장기자랑을 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특정 병원에서는 남자 직원들에게 여장과 걸그룹 흉내를 강요하기도 했다.
정상 출근시간보다 30분에서 한 시간 가량 이른 출근을 강요하고 병원 근처의 쓰레기 줍는 일을 시키는 등 병원 근로자들의 의무가 아닌 업무 외 지시를 강제한 사례도 나왔다.
다만, 성심병원의 선정적 장기자랑과 강요 사례에 대한 사회적 질타가 이어지고 정부가 근로감독에 들어가는 등 비판 양상이 강해지자 여러 병원에서는 자체적으로 장기자랑을 취소했다.
◇ '핵심갑질' 1위는 '임금체불'…'김장갑질·턱받이 갑질'등 황당사례도 늘어
직원들을 동원해 사장 가족 및 친지의 김장·결혼식 잡무 등을 돕도록 시키거나, 가족 여행을 가는 동안 별장에 있는 개와 닭 사료를 주라고 지시, 딸의 이삿짐을 나르라고 시키는 등의 전근대적 '황당 갑질'도 여러 건 제보됐다. 직장갑질 119는 "문의·제보 중 '기타'로 분류해야 하는 사례들이 점점 늘고 있는데, 이들은 김장갑질·턱받이 갑질 등 황당한 갑질 사례인 경우가 대다수"라고 밝혔다.
실제로 사례를 제보한 한 제보자는 "신입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막내라서 해야하는 일들을 하고 있는데, 기본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장님과 식사를 하면 턱받이를 해드린다거나, 사장님 퇴근 전엔 절대 퇴근해서는 안되는 그런 것들을 경험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직장갑질 119가 꼽은 '핵심 갑질' 이외에도 '연차·출산휴가·육아휴직 등의 휴가를 통제한다', '사소한 이유로 징계나 해고를 당했다', '일반적인 발령 등 인사이동을 당했다', '성희롱·성폭력을 당했다', '일하다 다쳤는데 산재처리를 받지 못했다' 등이 직장 내 갑질 사례로 제보됐다.
◇ 지옥이 된 직장, 재난 같은 갑질…정부가 긴급 대책 마련해야
직장갑질 119는 "직장에서 당한 '갑질'을 정부기관·언론제보를 통해 해결하는 것과 동시에 모임을 통해 권리를 찾아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직장갑질119는 노무사, 변호사, 노동전문가를 선정해 한림성신병원 직원들의 네이버 밴드를 만들었고, 이는 노동조합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앞으로도 업·직종별로 온라인 모임을 통해 스스로 권리를 찾아나가는 활동을 이어나가고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한국 직장의 민주주의가 거꾸로 퇴보되고 직장 내 갑질과 횡포가 더욱 심화되는 이유는 세 가지"라며 "첫째로 취업하기가 너무 힘들다. 어렵게 취직한 회사이기 때문에 갑질을 당해도 참게 된다. 둘째로 비정규직이 양산되며 직장이 계급화·위계화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명박·박근혜 정권동안 노동의 권리가 무시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과거 정부가 부당해고·부당노동행위를 처벌하지 않고 손을 놓은 사이 직장은 지옥이 되었고, 갑질이 재난 수준에 이르렀다. 지금 당장 정부가 긴급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대책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