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출연진과 제작진에게 '더 패키지'는 결코 만만한 작업현장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정신이 없었다'. 촬영을 위해 시민과 관광객을 통제해야 했고, 장면 하나하나를 두고 깊이 있게 토의할 시간도 없었다.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결의 이야기가 잘 살아있던 '더 패키지'에서 패키지여행의 가이드 윤소소 역을 맡았던 배우 이연희는, 촬영 때도 가이드 같은 모습이었다. '통솔'하는 역할을 했다고 자부했다.
평소 말수가 적었지만 '더 패키지' 이후 한층 밝아졌다는 관계자의 말처럼 그는 씩씩하고 활기찼다. 인터뷰 초반 첫 질문이 좀처럼 나오지 않자,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고, 모두 여자기자들만 있는 걸 보고 "여자들끼리 잘 이야기해 보자"는 말로 분위기를 띄웠다.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더 패키지' 종영 기념 이연희의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됐다. 제작발표회 때도, 최근 인터뷰에서도 반복해 말했던 '운명 같은 드라마'라는 의미부터 물었다.
◇ '더 패키지'가 운명 같은 드라마였던 이유
이연희는 4년 전 처음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때의 목적지가 프랑스 파리였다. 당일치기로 벨기에로 가는 투어에 참여하면서 우연히 한 가이드와 인연이 닿았다. 함께한 다른 여행객들은 이연희의 얼굴을 알아보았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고 각자 여행을 즐겼다. 그 배려 덕에 이연희도 온전히 여행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여행 중 지켜본 가이드는 무척 열정적이었다. 운전을 맡는 것은 물론이고, 여행객들의 질문 하나하나에 모두 답하는 모습을 보고 이연희는 가이드란 직업에 '반해버렸다'. 같이 맥주, 와인 한 잔 하는 사이가 될 만큼 친해진 것은 물론이다.
캐스팅 확정이 마무리됐을 때에야 소식을 전했는데 가이드 중 한 명은 그 작품이 '더 패키지'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에게 패키지여행 중 도움말을 구했던 사람이 바로 '더 패키지'의 천성일 작가였기 때문이다.
이연희는 "인연이 너무 신기했다. 저희끼리는 '진짜 소오름!'이라고 했다"며 "(프랑스 여행) 4년 만에 제가 꿈에 그려왔던 시나리오가 눈앞에 들어와서 작품에 대해 애정이 많았다"고 말했다.
가이드 역을 꼭 해 보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던 이연희는 철저히 준비했다. 일단 투어를 다니며 정보를 알아가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대사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다. '마리 앙투아네트' 등 도움이 될 만한 영화를 봤다. 프랑스에 대한 애정으로 원래 배우고 싶었던 불어도 이번 작품을 계기로 배우게 됐다.
◇ 실제 가이드에게 들은 "너, 가이드 다 됐구나"라는 말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여행객들이 가이드에게 잘 호응하지 않는 상황을 촬영할 때 어려움을 토로했더니 실제 가이드들은 "그거 어떻게 알았어?", "너, 가이드 다 됐구나!"라며 맞장구를 쳤다. "윤소소 가이드님"이라는 말은 이연희를 가장 기분좋게 한 말이기도 했다.
연기 상황일 뿐인데도 여행객들이 가이드 말에 시큰둥하다가 여행 끝에서야 호응을 보일 때 정말로 서운한 감정을 느끼고, 에펠탑을 보고 좋아하는 배우를 보고 "내가 좋아하는 걸 이 사람도 좋아해 주니까 너무 좋더라"고 고백할 만큼 이연희는 가이드 역에 몰입해 있었다.
이연희는 "쉬는 날에도 배우들이 뭘 물어보면 모르겠다는 말을 못하겠더라. 갑수 선배님(정규수 분)은 밥 먹을 때도 '가이드 언니, 저거 뭐에요?'라고 하셨다. 몰라도 '이따 설명해 드릴게요'라고 하게 됐다"며 "(배우들끼리도) 분위기가 되게 좋았다"고 회상했다.
조용한 편이었던 이연희는 '더 패키지'를 만나며 현장을 '엄청 이끌었다'. 바빴고 정신없었기에 배우들도 예민했다. 예민한 현장을 버티기 어려워했던 이연희는 이번에는 그마저도 너무 즐거웠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진짜 가이드처럼 모든 걸 다 봐야겠다는 심정으로 하다 보니 배우들을 자연스럽게 통솔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연희는 "리더십도 배웠고, 제가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인데 말을 많이 했다.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정말 많은 발전인 것 같다"며 "예전에는 인터뷰할 때도 쓰는(받아 적는) 시간을 드렸는데, 지금은 이렇게 계속 얘기하고 있으니까"라며 미소 지었다.
◇ '인생 캐릭터'라는 호평까지
'항상 웃고 살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과 달리 윤소소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사귀던 선배의 말에 함께 프랑스 유학을 왔지만 그는 이별을 통보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공부를 마치고 학위라도 받아야겠다는 마음에 남았던 소소는 취미로 하던 가이드를 직업으로 삼은 캐릭터였다.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 받은 과거가 있는 인물이니만큼, 이연희는 '까칠함'에 중점을 두고 연기하려고 했다. 그는 "사랑고백하고 부드럽게 다가오는 남자에게 '아, 이 사람 왜 이러지?'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진짜 좋아하게 되지 않나. 하지만 준비가 안 돼 있다면서 밀어냈다. 저는 그런 걸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소소는 자기 자신을 별로 안 좋아하지 않나. 고집스러운 면도 있고. 이런 환경 속에서도 부모님 뜻을 거절하고 무작정 (프랑스에) 와 있고. 그래서 저는 가이드라는 직업을 좀 더 멋있게 생각했다. 소소의 아픔을 어떻게 표현할까에 더 집중했다"고 밝혔다.
어느 때보다도 역할에 빠져들었던 이연희는 '인생캐릭터를 만났다'는 평도 들었다. 그는 "저는 너무 좋았다. 개인적으로도 정말 손꼽을 만한 작품인데 거기에 시청자들이 좋게 봐 주셔서 너무 좋았다"면서 "제가 노력한 만큼 잘 봐 주셔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작가, 감독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이연희는 "감독님한테 너무 감사하다. 모두가 진짜 후반작업을 정말 고생하면서 만드셨다. 누구 하나 주인공이 아닌 사람이 없어서 이걸 어떻게 편집할까 싶었다. 감독님이 정말 어려우셨을 것 같다"고 전했다.
또한 "우리(배우들)끼리는 작가님이 천재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쩜 이렇게 멜로를 잘 쓰셨지? 하면서. 작가님의 멜로는 계속 보고 싶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컷 인터뷰 ② 이연희 "앞으로 더 배우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