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포 그대로··한국인 눈도 못마주쳐
- 라이따이한에 손가락질, 고통 대물림
- 문 대통령 "마음의 빚" 의미 있지만
- 현지서는 공식사과 아니다, 실망도
- "우리도 풀어야할 과거사 있다"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3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김광일 (기자)
◆ 김광일> 안녕하십니까.
◇ 김현정> 언제부터 언제까지 베트남에 다녀온 거죠?
◆ 김광일> 11월 2일부터 8일까지 일주일간 다녀왔습니다.
◇ 김현정> 8일까지. 그러면 대통령 순방 일정에 동행한 게 아니라..
◆ 김광일> 그보다 더 먼저 취재를 갔었습니다.
◇ 김현정> 베트남 기획취재를 다녀온 거군요. 베트남에 가서 우리 한국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베트남인의 실상을 취재하고 오셨다고요?
◆ 김광일> 일단 베트남인 피해자의 목소리부터 들어보시죠.
◇ 김현정> 그러죠.
"저는 방 안에서 갓난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군들이 집에 들이닥쳐서 아이들을 먼저 쐈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향해서도 계속 쐈고 집에 불을 붙였습니다."
◇ 김현정> 이게 언제 얘기예요?
◆ 김광일> 1968년 얘기인데요. 이 목소리는 베트남 중부 꽝남성 하미마을에 사는 79살 쯔엉티투 씨 목소리입니다. 이 하미마을은 68년에 한국군 해병대 청룡부대가 지나간 뒤 주민 135명이 숨진 채 발견된 곳입니다.
◇ 김현정> 135명이?
◆ 김광일> 네. 그날 쯔엉티투 씨 집에도 군인들이 들이닥쳐서 7살짜리 큰딸, 4살짜리 아들에게 총을 쐈고 그렇게 일가족 12명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 김현정> 한국군이요?
◆ 김광일> 네, 마을 사람들은 한국군, '따이한'이라고 명확하게 지목하고 있습니다. 총과 수류탄 파편을 맞았던 쯔엉티투 씨도 막내딸을 이렇게 둘러업고 허겁지겁 집 밖으로 도망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나중에 다친 오른발을 잘라내야 했고, 그렇게 발목이 끊어진 채로 50년을 살아왔다고 합니다.
◇ 김현정> 쯔엉티투 씨가 아까 그랬잖아요. '갓난아이를 나는 안고 있었다. 한국군이 들이닥쳤다' 선명하게 기억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정도로 큰 상처가 남았다는 얘기죠?
◆ 김광일> 그래서인지 쯔엉티투 씨는 바로 앞에 있는 제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설명을 들어보니까 학살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신의 가족을 죽인 한국 사람을 잘 쳐다보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 김현정> 한국 사람이다 그러면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 김광일> 네, 50년이 넘도록 공포가 다 해결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음 날에는 남쪽 지방 광응아이성이라는 곳의 빈호아 마을을 찾았는데요. 이곳에서 도안응이아 씨를 만났습니다. 목소리부터 들어보시죠.
[녹취/더빙: 도안응이아]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슬프고 마음이 너무 아파요. 엄마도 죽었고 할머니도 죽었고 나는 눈을 잃었잖아요."
◆ 김광일> 빈호아 마을에서는 마을 주민 430명이 학살당했다고 하는데요.
◇ 김현정> 430명이요?
◆ 김광일> 네, 그렇습니다. 만 나이로 0세. 갓난아기였던 도안응이아 씨는 총탄에 쓰러진 어머니 배 밑에 깔려서 사흘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 김현정> 정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분이네요.
◆ 김광일> 하지만 이때 빗물에 흘러든 탄약에 눈이 멀어서 시각장애를 갖고 50년간 살아왔습니다.
◇ 김현정> 지금 여러분 들으시면서 깜짝 놀라셨을 겁니다. 그러니까 한국군이 들이닥쳐서 이 마을은 135명이 숨지고 저 마을은 430명이 숨지고. 이 증언들이 지금 줄줄줄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는 우리 군이 가서 이런 일을 했으리라고는 몰랐고. 일부러 홍보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몰랐던 부분인데. 상당히 많은 민간인 베트남인들이 학살이 된 거죠, 우리에 의해서.
◆ 김광일>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은 약 80건. 희생자는 모두 9000여 명으로 지난 2000년에 집계됐는데요. 지금 17년이 지났죠. 현장조사를 할 때마다 추정치는 계속 늘어나고 있어서 아마 제대로 집계해 보면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 김현정> 베트남전이 끝난 게 1975년이잖아요. 그러면 사실은 42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가보니까 그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던가요?
◆ 김광일> 특별히 이번 취재에서는 한국계 혼혈인 이른바 ‘라이따이한’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응우엔티 낌 씨 만날 수 있었는데요. 그분 목소리부터 좀 들어보시죠.
[녹취/더빙: 응우엔티 낌]
"우리는 미국하고 싸웠는데 쟤는 왜 한국인이야. 사람들은 저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며 따이한, 라이따이한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럴 때면 너무 치욕스럽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 김현정> 응우엔티 낌 씨? 무슨 사연이 있는 겁니까?
◆ 김광일> 이 낌 씨 어머니는 전쟁 때 미군기지에서 일을 했었는데요. 한국군 병사가 건넨 오렌지주스를 마시고 쓰러졌다가 깨어났는데 옷이 벗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 김현정> 성폭행 당한 거군요.
◆ 김광일> 그렇게 한국계 혼혈로 태어났던 게 낌 씨이고요. 어린 낌은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 차별과 멸시를 받아야 했는데 몇몇 친구들은 잠시 어울려 놀다가도 다른 애들이 와서 라이따이한이라고 부르면 다들 도망가버렸다고 합니다.
◇ 김현정> 라이따이한, 여러분도 많이 들어보셨을 테지만.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 김광일> 뒤에 있는 '따이한', 대한이라는 말인데요. 베트남인들이 한국인을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에 '라이'에는 혼혈, 잡종 이런 경멸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린 낌은 그렇게 적군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주변의 손가락질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습니다. 낌의 딸도 함께 만날 수 있었는데요.
◇ 김현정> 낌 씨가 결혼을 한 거군요?
◆ 김광일> 네, 생활고는 딸에게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딸 목소리도 좀 들어보시죠.
◇ 김현정> 그러죠.
[녹취/더빙: 응우옌티낌 딸]
"주변 친구들은 제가 라이따이한인 줄 모르지만 저희는 항상 마을에서 가장 가난했습니다. 엄마는 늘 멀리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엄마랑 같이 있기도 어려웠습니다."
◆ 김광일> 네, 그렇습니다.
◇ 김현정> 베트남의 한 마을에는 심지어 한국군의 학살을 기록해 놓은 한국군 증오비가 있다면서요?
◆ 김광일> 저는 빈호아 마을 입구에 세워진 증오비를 볼 수 있었습니다. 높이 3.5m, 너비 5m쯤 되는 큰 비석이었는데.
◇ 김현정> 굉장히 크네요, 그 정도면.
◆ 김광일> 내용 앞부분만 앵커께서 한번 읽어주시겠습니까?
◇ 김현정> 여기 있습니다. "하늘에 가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 김광일> 이 문구 아래에는 해병대 청룡여단이 마을 주민 430명을 살해했다는 얘기가 아주 구체적으로 또 적혀 있었습니다. 비문 좌측에는 표가 나와 있었는데 희생자 중 268명이 여성이었습니다. 또 연령대별로는 182명이 어린아이였고 109명이 50세에서 80세의 노인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 김현정> 노약자가 상당히 많네요?
◆ 김광일> 네, 희생자들이 베트콩 게릴라군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는데, 애초에 이 마을에 젊은 남성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 김현정> 그렇네요. 그야말로 힘도 쓸 수 없는 민간인들 그것도 어린아이, 노인들이 이렇게 많은 수 학살됐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이런 증오비까지 세워진 거죠. 김광일 기자, 증오비라는 걸 저는 그냥 말로만 들어도 충격적인데 직접 가서 한국인의 눈으로 본 심정은 어떠셨어요?
◆ 김광일> 참담했습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개인적으로는 처음 봤을 때 숨이 턱 막힌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들었고요. 증오비는 전쟁 직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는데 얼마나 미웠으면 그 와중에 이런 비석까지 새겼나 싶기도 하고. 증오비가 있던 이 빈호아 마을 같은 경우에는 제가 접근할 수도 없을 정도로 상처가 남아 있는 곳이었습니다.
◇ 김현정> 그러니까 한국 기자가 취재를 하러 간다고 그러는데 혹시라도 불상사가 일어날까 봐 걱정이 돼서 막아야 될 지경으로, 주민들 사이에 여전히 분노가 있단 말이에요. 놀랍네요.
◆ 김광일> 그래서 이날은 저한테도 좀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 김광일> 그렇습니다. 국방부에서도 공식적인 어떤 입장이나 조사계획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의 학살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지난 1999년 이래 민간 차원에서는 어떤 진심 어린 사과나 도움의 손길이 계속해서 이어져왔는데요.
◇ 김현정> 민간 차원에서는.
◆ 김광일> 네, 민간 차원에서만입니다.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계속 피해 왔거든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라고 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리 국민은 마음에 빚이 있다”고 유감을 표명했어요.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은 침묵했고요.
◇ 김현정> 문재인 대통령이 이번에 사과한 그 메시지를 듣고 ‘무슨 얘기야, 갑자기? 왜 뜬금없이 저런 얘기가 나왔지’라고 생각하셨던 분들이 있다면 바로 이런 사연이 깔려 있는 겁니다. 이번에 우리의 사과 메시지 이건 어떻게 평가를 해야 되나요?
◆ 김광일> 이렇게 "마음의 빚" 정도로 표현해 준 게 다행이라는 반응도 좀 있는데요. 아쉬움도 좀 큽니다.
◇ 김현정> 그래요?
◆ 김광일> 일단 베트남 사람들은 이걸 사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고요.
◇ 김현정> '이 정도로는 사과가 아니다', 그쪽 반응은?
◆ 김광일> 입장을 바꿔봐서 우리가 일본한테 일본군 위안부 피해에 대해서 이런 마음의 빚 이런 표현을 듣는다면 아마도 같은 반응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 김현정> 그럴 수도 있겠네요.
◆ 김광일> 지금 베트남 현지에 있는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상임이사에 따르면 문 대통령의 이런 발언 자체를 베트남 사람들은 알지도 못한다고 하고 있고요. 이 말을 전해 들은 베트남인들의 경우 ‘이건 사과가 아니다’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 김현정> '부족하다, 이건 아니다.'
◆ 김광일> 앞으로 구체적인 가해 사실에 대한 책임 인정이나 조사, 보상 등 방침 같은 게 나와야 그 진정성을 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윤미향 상임대표 얘기도 들어보시죠.
[녹취: 윤미향 정대협 대표]
"경제, 사회, 문화, 교류, 그 언제든지 무너져내릴 수 있는 굉장히 위험한 우호관계라고 생각을 합니다. 과거 역사의 올바른 청산. 그 위에 세워질 때 진정한 미래 지향적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게 바로 오늘 우리가 일본과 아시아 관계에서 배우는 거죠."
◇ 김현정> 우리나라 한국도 풀어야 할 과거사 문제가 있다는 얘기. 여러분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김광일 기자, 수고하셨습니다.
◆ 김광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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