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옥'은 여성 주체적 누아르라는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악녀'에 이어 다시 한 번 여성이 주인공인 누아르를 구현해냈다. 그러나 남성 누아르 시각 안에 갇힌 여성들은 그 서사와 감정이 전통적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끈끈한 연대 또한 어딘가 부족하다. 그래서 '미옥'은 여성이 주인공인 남성형 누아르에 가깝다.
"이 영화가 여성 누아르인지 그냥 누아르인지 선택하라고요? 그건 노코멘트할게요. (웃음) 모성애 캐릭터가 나올 때마다 여성 캐릭터에 어머니라는 키워드를 제외하면 할 이야기가 없나? 그런 생각을 했죠. 어머니 역할은 제게 아예 전제 자체가 없었어요. 주환이를 지키려고 했던 것도, 결국 평범한 삶에 대한 욕망 속에 막연한 대상이었던 아들이 들어오게 된 거죠. 모성이라기보다는 현정이 스스로의 욕망을 지키고자 했던 걸로 받아들였어요. 스스로 어머니라고 의식하는 순간 제가 무엇인가를 준비하게 되거든요. 그렇게 의도적으로 배제했는데도 관객들이 '모성애'를 느끼더라고요."
"사실 나현정과 김 여사 그리고 웨이, 여성 캐릭터들 간에 그들만의 연대가 있거든요. 그게 수면 위로 더 올라오지 않아서 아쉬움이 있죠. 웨이 역은 시나리오에서 훨씬 더 존재감이 컸는데 실제 영화에서도 그렇게 했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그들 역시 상훈 못지 않게 그들만의 애정과 끈끈함, 애환 이런 연대감이 있거든요. 아마 이런 부분이 살았다면 배우들도 연기할 것이 많고, 돋보이고, 영화 또한 더 탄탄해졌으리라 생각해요. 누아르 속 여성 캐릭터가 꼭 액션으로 무너뜨리는 것이 끝은 아니잖아요?"
김혜수의 필모그래피에는 '미옥'만큼 강렬한 누아르 영화가 있다. 바로 지난 2014년 개봉한 영화 '차이나타운'이다. 김혜수의 전유물과 같은 도시적인 이미지와 달리 어딘가 강인하면서도 거친, 날 것과도 같은 캐릭터였다.
"일부러 강한 캐릭터를 선택하는 건 아니에요. '굿바이 싱글'처럼 부드러운 작품들도 있는데 유독 '차이나타운'의 영화 성격이 훨씬 셌던 것 같아요. 이건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거의 생존의 문제잖아요. '미옥'은 차가움과 뜨거움이 공존하는 캐릭터라고 하는데 분명히 안에는 뜨겁게 끓는 감정이 있지만 감추고 누르며 살아가야 하는 여자였던 것 같고요."
이선균과의 호흡에는 큰 만족감을 나타냈다. 이선균은 이번에 미옥을 향한 아픈 순애보를 가진 조직의 해결사 상훈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 정말 매력적이었지만 쉽지 않은 역할이었어요. 상훈은 마음을 따라가게 해야 하는 캐릭터니까. 이선균에게도 큰 도전이었을 텐데 그 배우의 그런 낯선 모습을 보는 쾌감이 있더라고요? 멋지게 해낸 것 같아서 정말 자랑스럽고 좋아요."
"개인적으로는 불필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그걸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는
연출자의 시선이나 관점에서 기인한 거겠죠."
마지막 액션 장면은 '미옥'의 절정이다. 승리를 향해 가는 길이 아닌 처절한 생존과 배신, 믿음이 한데 뒤섞여, 이 액션은 어딘가 모르게 비장하고 구슬프다.
"현정의 목적은 내 아들을 구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으로 상훈을 만난다. 감정적인 사실을 확인하고 싶고, 정확하게 전하고 싶고, 그를 만난다가 첫 번째였어요. 스스로 걱정했던 것에 비하면 연기는 무난했던 것 같아요. 보통 일상 속에서 여성들이 감정을 그런 방식으로 표출하는 일이 잘 없으니 이 장면만으로도 여성들에게 주는 쾌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김혜수에게 연기란 컨디션에 상관없이 스스로 빠져드는 어떤 것이다. 마음을 강하게 이끄는 작품이 없다면 아무리 최상의 컨디션이라도 휴식기를 가진다. 자신의 상태와 좋은 작품이 나타나는 시기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컨디션이 너무 좋아도 마음에 끌리는 게 없으면 할 수가 없죠. 컨디션이 너무 나쁘고,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데도 그 작품을 보면 용기가 막 생겨요. 그리고 또 난 여기까지인가봐, 하면서 후회하고 그런 반복이에요."
"작품을 하지 않으면 시간 여유가 많죠. 제가 해야 하는 일이 직간접적으로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경험치를 늘려가는 거거든요. 개인적으로 제 삶을 보면 보편적인 모든 것들을 차곡차곡 경험하지 않았어요. 빈 공간이 있고, 그걸 자연스럽게 메우려고 하다 보면 책을 읽게 되는 거예요. 세상에는 책이 필요없는 사람이 있죠. 하지만 저는 책이 필요한 사람이에요. 개인적으로도, 직업적으로도."
김혜수는 충무로에서 독자적인 티켓 파워를 가진 몇 안 되는 여성 배우다. 그런 김혜수가 느끼기에 현재 충무로에서 논의되고 있는 여성주의 담론, 영화계 내에서의 실질적인 성평등 구현 등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을까. 그에게도 응원하고픈 여성 배우들의 활동이 있었다.
"제가 체감할 정도로 엄청난 변화는 아니지만 분명한 시도는 있었어요. '미씽: 사라진 여자'라는 영화에는 정말 주체화된 여성의 무엇인가가 있었고, '용순'이라는 영화 역시 너무 익숙하고 평범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저변의 감정과 디테일을 제대로 주목하고 있거든요. 저는 그런 영화들을 계속 응원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또 자신의 영역에서 스펙트럼을 넓혀서 다른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는 시도도 있었죠. 시도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이런 것들을 화두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 의미나 가치, 성과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유의미한 시도였다고 생각해요."
최근 영화계 내에서 뜨거운 논쟁으로 불붙은 성추행 문제 또한 김혜수는 직선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운이 좋았을 수도 있지만 저 같은 경우는 성인이 됐을 때도 그런 상황이 생긴 적이 없었거든요. 다만 제대로 오해없이, 누군가 자정작업을 한다면 좋은 거라고 봅니다. 무언가를 잘하기 위해 누군가가 억울해지면 안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