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 그런데 이명박은 '보수'입니까?
② 노무현이 '보수의 나라'에 뚫은 숨구멍
③ 끈 떨어진 '박정희' 붙드는 요지부동 구태
④ "모든 적폐는 '이승만의 승리'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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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수주의의 이념적 특징과 역사를 연구해 온 정치학자 이나미(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연구위원은 "해방 뒤 이승만 정부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보수세력은 남북 분단을 자신들의 현실적인 이익으로 여긴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당대 분단이 현실화 하는 상황은 이를 먼저 감지한 사람들에게는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더욱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북한이 일찌감치 분단을 예견하고 움직임에 들어간 상황에서 (남북 분단이라는) 대세에 확실하게 협력하느냐, 아니면 마지막까지 통일에 힘쓰느냐라는 선택지 안에서 보수는 현실에 영합하는 방향을 택한 셈이다."
이나미 연구위원은 "더군다나 남한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무시 못한다는 점을 염두에 뒀을 때, 분단은 현실주의자로서 보수가 추구하는 개인의 영달·영리와도 잘 맞았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결국 보수는 남북 분단 상황을 자신들이 살아남는 방편으로 활용한 셈이다. 보수주의라는 표현이 쓰이고 보수단체가 지금처럼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때가 지난 2000년 김대중 정부의 남북정상회담 시기와 딱 들어맞는 것도 보수의 이러한 현실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본다."
역사가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방 뒤부터 지금까지 진보진영이 주류를 잡지 못했던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이승만의 승리, 즉 김구의 패배였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김구가 암살되는 등 중간파 세력의 몰락 이후 이승만은 미군정 시기 집권여당 격이던 한민당(한국민주당)과 손잡고 권력을 장악한다. 하지만 한민당도 결국 이승만의 권력 독점 의지로 인해 버림받고 야당이 돼 민주당으로 개편된다. 문제는 1960년대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를 겪으면서 여야가 모두 구조적으로 '반공' '자유경제'라는 제한된 민주주의를 표방하게 됐다는 점이다. 한국의 주요 정당이 강한 보수성을 띠고 성장하게 된 정치적 한계가 그어진 것이다."
심 소장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승만과 한민당의 동맹은 결국 친미(親美) 정권의 탄생과 결을 같이 한다"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보수의 강한 친미 성향 역시 이때 다져졌다"고 전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친미파를 키우려는 미국의 주도로 권력을 잡았다. 한민당에는 친일 혐의를 벗기 힘든 지주 등 재력을 지닌 인사들이 다수였으니 미국 유학파가 많았다. 물론 미국이 김구·김규식·여운형 등 임시정부 세력에 관심을 안 뒀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 임시정부 세력은 '냉전'과 '민족' 사이에서 민족을 택한 사람들이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불편했던 것이다. 결국 이승만과 한민당은 이 같은 선택의 기로에서 냉전, 그러니까 친미를 선택한 세력이다."
◇ '통일정부' '정당한 정부' 외면했던 이승만식 '생존 이데올로기' 대물림
"예를 들어 5·16군사쿠데타가 났을 때 그 전에 있던 정당들을 전부 '보수적'이라면서 '5·16세력이 진보적'이라고도 얘기했다. 지금 누가 5·16세력을 진보로 보나. 시대 상황에 따라 보수와 진보의 개념도 달라지는 것이다."
김용호 교수는 "미국은 진보와 보수의 구분 기분을 주로 정부 역할의 크기에 둔다. 미국 공화당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면서 경제·사회·일반 국민의 생활에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기 때문에 보수"라며 "유럽은 또 다르다. 소유권 문제를 중심에 두는데, 보수는 사유재산을 절대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진보는 생산시설 등의 국유화와 국민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복지를 강조한다는 데 차이가 있다"고 전했다.
"그런데 한국은 보수와 진보 모두 정부 역할을 굉장히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정부가 경제·사회·일반 국민 생활에 개입하는 것을 당연시하면서 너도나도 '정부가 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특히나 분단 상황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주로 대미·대북 정책 등 외교안보 문제에서 보수와 진보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그는 "민주주의·자유주의는 사상적으로 다원주의에 뿌리를 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며 "다양한 사상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그것들이 그냥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에 보수나 진보로 묶이고 체계화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의 특징은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자기 기득권만 지키려 드는 경우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보수는 끈임없이 시대 상황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특정 이념에 사로잡혀 '이것만이 우리의 길'이라고 얘기할 때가 아니다. 지금 보수는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빨리 파악하고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의 무게를 하루빨리 인식해야 할 때다."
정치철학자 박동천(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의 보수세력은 가치보다는 '생존'을 중심으로 연결됐다고 볼 수 있다"며 그간 이를 기득권 유지에 악용해 온 보수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승만을 보면 '통일정부냐 아니냐' '정당한 정부냐 아니냐'는 상관없이 정부 하나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박정희의 경우도 '빈곤에서 벗어나자'는 먹고 사는 문제에서 출발해 딱히 굶어죽을 지경이 아닌데도 이를 권력 유지 방편으로 활용했다. '미래 먹거리'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듯이 생존을 이데올로기로 들고 나오게 되면 '후손들의 먹을 것을 걱정한다'는, 막연한 공포 심리에 뿌리내린 바람몰이가 이뤄진다."
박 교수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생존 때문에 지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시대가 변한 만큼 그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정당화에 몰입해 있다"며 "그렇게 생존 이데올로기를 중심에 둔 인식은 여전히 권력, 지위 등 이권과 결합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 구시대 보수 대체할 '新보수'…"민주당에 그 역할 맡긴다면"
지난 보수 정권이 상식을 벗어난 구시대적인 행태를 벌일 수 있었던 데 대해 이나미 연구위원은 "한 시대에 여러 특징을 지닌 세대가 공존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노인인권 관련 교재 가운데 '노인은 왜 보수적인가' 부분을 집필하면서 여러 사례를 통해 얻은 결론은 소위 '동시성의 비동시성'이다. 한 시대에 여러 특징을 지닌 다양한 세대가 공존한다는 이야기다. 한국 보수주의의 전근대성에는 유교적 맹목성이 자리하고 있다. 임금에게 충성하듯이 박정희·박근혜에게 충성하는 집단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는 "보수단체의 집회 현장에서는 '마마' '사육신'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며 "박근혜 스스로도 자신을 정통성 지닌 왕족이라고 생각하기에 모든 특권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렇게 특별히 전근대적인 그룹이 있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지난 겨울 촛불집회에서도 봤듯이, 한국 사회 젊은 세대의 다양성 등에 대한 논의는 정부·입법부·사법부·학계보다 한참 앞서가는 측면이 있다. 우리나라의 특수성은 독일 사회와 유사하다. 역사적으로 엄청나게 커다란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는 공통점을 지녔기 때문이다. 독일은 과거 나치즘부터 패전, 분단, 경제성장, 통일까지를 한 세기도 안 되는 기간에 겪다보니 세대별로 워낙에 다른 경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비슷하다."
이 연구위원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젊은 세대가 노인 세대에게 '틀딱'이라는 혐오 표현을 붙이는 것처럼, 독일에서도 아버지 세대를 지칭하는, 청산해야 할 구태로 여기는 표현이 있다"며 "노인들 또한 과거의 주인공에서 패배자가 됐다는 상실감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몰라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심용환 소장은 "한국 사회에서 이제 '박정희 신화'는 끝났다고 본다"며 "보수세력에서도 결국 박정희 카드를 버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전히 박정희를 맹신하는 60대 이상 세대가 있기는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폐해를 전 국민이 느낀 상황에서 보수정당조차 박정희 카드로는 어느 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길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박정희가 사라지는 것과 박정희가 만들어놓은 구조가 사라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뿌리 깊은 박정희 구조를 어떻게 개편할까'에 있다고 여겨진다"며 "이 점에서 개인적으로 나름의 진정성을 지닌 더불어민주당이 자유한국당 등 기존 보수정당을 대체하는, 새로운 보수로 자리잡는 정치지형을 그려본다"고 강조했다.
◇ "새 세대가 새 시대 열어젖힐 정치적 상상력 발휘해야 할 때"
"민주당 지지에는 항상 정의당 표가 많이 들어간다. 우파 정권이 들어설 것을 우려한 전략적 선택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견고한 양당 구도에서 좌든 우든 언제나 차선을 선택해 온 경향이 크다. 이에 대한 해법은 정당 스팩트럼을 넓혀서 온건 보수당, 온건 진보당, 더 나아간 진보당이 나오도록 힘쓰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진로를 수정할 수 있는, 연정이 가능한 바람직한 정치지형을 다질 수 있다."
심용환 소장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이어지는 역사의 변혁기를 들려 주면서 "조선의 탄생은 정치·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흥미로운 점은 1391년에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고 조선을 세웠다는 사실"이라고 전했다.
과전법은 고려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에 따른 국가 재정 고갈 문제를 해결하고자 신진사대부들이 주축이 돼 실시한 토지제도다. 토지의 국유화를 원칙으로 공전(公田)을 확대하는 데 방점을 뒀다.
"결국 경제개혁을 이룬 뒤 나라를 세웠다는 말인데, 앞서 공민왕 등 고려의 여러 왕이 못 이룬 것을 조선 혁명파는 해냈다. 단순히 왕조를 세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경제 기반을 먼저 다진 덕에 극심했던 사회 혼란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우리가 보통 역사에서 삼국시대나 후삼국시대를 즐겨 찾지만, 이 때는 '전쟁의 시대'다. 갈등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미친 듯이 싸워 안정을 찾았던 최악의 역사 변동기인 셈이다."
그는 "우리는 지금 새로운 변화를 바랄 수밖에 없는 시대를 맞았다. 외부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G2' 구조가 다져지는 등 동아시아 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며 진단을 이어갔다.
"일본은 아베 정권 아래 보수주의 시대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고,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떠오르면서 경제 질서도 재편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땅값, 집값, 노동 환경 등과 관련한 모순이 극에 달했다. 결국 대내외적으로 박정희 시대에 뿌리를 둔 정치·경제 해법을 보완하는 정도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고 본다."
심 소장은 "우리는 이명박·박근혜와의 싸움에서 힘겹게 이겼고, 이제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열망에 부풀어 있다"며 "당위적으로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정치운동이 이뤄져야 할 시점"이라고 역설했다.
"역사적 관점으로 보면, 시대의 흐름 안에서 거대한 모순이 만들어졌을 때 이를 극복하는 민족이나 나라가 있고, 극복하지 못하는 민족과 나라가 있다. 결국 현 상황에서 구시대 보수인 자유한국당이 자멸하고 온건 보수세력으로서 민주당이 장기집권 체제를 굳히면, 그 이후 한단계 진화한 진보정당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보수, 보다 건전한 보수가 만들어지면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진보 영역에 대한 고민들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물론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이러한 흐름은 역사의 순리로 다가온다. 이제는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