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움푹 팬 눈에서 눈물 뚝뚝…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그 이후 ② "적군 핏줄 라이따이한" 한국군 성폭행 피해자의 주홍글씨 ③ "죄악, 만대(萬代) 기억하리라"…베트남의 '한국군 증오비' ④ '마음의 빚'에 멈춰선 베트남 학살…공식사죄 언제쯤? |
베트남전쟁 당시 대규모 민간인학살을 경험했던 피해 주민들은 마을에 '한국군 증오비'를 세워두고 50년 전 가해의 주체를 명확히 지목하며 학살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다.
◇ "한국군이 430명 죽였다" 매일 곱씹어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성 빈호아 마을 입구 언덕배기에는 높이 3.5m에 너비 5m쯤 되는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져 있다. 지난 5일 평화기행단이 증오비를 찾았을 때 학생들을 비롯한 주민 다수는 이곳을 지나며 학살의 고통을 곱씹고 있었다.
다음 날에는 근처 꺼우 마을로 들어가 중화기와 수류탄 등을 동원해 273명을 학살했고 찌호아 마을을 습격해 12명을 더 살해했다. 응옥흐엉 마을에서는 80세 노인을 참수해 머리를 들판 한가운데 진열한 것으로 기록됐다.
증오비 비문 좌측에 쓰인 통계를 보면 희생자는 모두 430명에 달했다. 이 중 268명이 여성이었다. 연령대별로는 182명이 어린아이였고 109명이 50세~80세의 노인이었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7명은 임신한 여성이었으며 2명은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2명은 산 채로 불에 탔고 1명은 참수, 1명은 배가 갈라진 채 발견됐다.
주민들은 학살을 마친 군인들이 시신 상당수를 우물에 던져 넣은 뒤 불을 질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00년대 초반 새 우물을 파기 전까지 수십 년간 주민들은 식수를 이용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 '극적 생존' 갓난아기, 주민들이 품었다
하지만 핏물과 빗물에 흘러든 탄약으로 인해 눈이 멀었고 그렇게 50년을 살아왔다. 밤에는 자주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고아가 된 그를 거둬준 건 마을 주민들이었다. 엄마들이 젖을 먹여 키웠고 학교에도 보내줬다. 그가 10세 때 남들보다 늦게 첫걸음을 때던 날 주민들은 잔치를 열었다.
그는 자신의 집을 찾은 평화기행단을 향해 연신 웃음을 보였다. 이후 CBS노컷뉴스 취재진과의 별도 인터뷰에서 "어머니도 할머니도 없이 그동안 너무 고통스럽고 슬펐다"면서도 "한국 사람들이 옛날엔 참 많이 미웠는데 지금은 좀 괜찮아졌다"고 털어놨다.
◇ 국방부 "베트남 관계 고려…공식 입장 없어"
베트남 곳곳에 설치됐던 이런 한국군 증오비는 현재 총 전국 3곳에 남아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상임이사는 "어딘가에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주민들은 증오비가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세우지는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우리 국방부는 "베트남과의 관계를 고려해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공식적인 입장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