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정상회의 참석차 필리핀을 방문 중인 문 대통령과 리 총리는 이날 늦은 밤 진행된 회담에서 한중관계의 변화를 물씬 느끼게 하는 대화를 이어갔다.
문 대통령은 공개발언에서 "중국 고전에서 '꽃이 한 송이만 핀 것으로는 아직 봄이 아니다. 온갖 꽃이 함께 펴야 진정한 봄이다'라는 글을 봤다"며 "오늘 총리님과의 회담이 다양한 실질 협력의 다양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문 대통령이 인용한 구절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2014년 한 언론에 쓴 기고문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중관계 발전에 대한 의지를 시 주석이 인용했던 시구를 인용하는 세심한 방식으로 드러낸 것이다.
리 총리도 미리 맞춘 것처럼 봄과 관련된 시를 인용하며 화답했다.
리 총리는 "대통령께서 중국 고전을 인용해서 중-한 관계가 따뜻한 봄을 맞이했다고 말씀하셨다. 중국에서도 이런 비슷한 말이 있다"며 "'봄이 오면 강물이 먼저 따뜻해지고, 강물에 있는 오리가 따뜻한 봄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양측의 공동의 노력을 통해서 중-한 관계를 조속히 정상적인 궤도에 추진해 나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후 비공개로 전환된 회동에서 문 대통령은 '바둑'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리 총리와의 회담을 풀어갔다는 후문이다.
문 대통령은 "리 총리의 바둑이 수준급이라고 들었는데 저도 (바둑을) 좋아한다. 최근 노영민 주중한국대사와 창하오 9단, 추궈홍 주한중국대사와 이창호 9단이 짝을 이뤄 바둑을 둬 화제가 됐다"며 "한중간 이런 문화적 공통점이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리 총리는 "제가 알기로는 문 대통령도 바둑을 좋아하는 것으로 아는데 바둑은 대승적이고 전반적인 국면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고 종합적이고 전략적인 안목이 있어야 한다"며 한중 관계도 종합적이고 전략적인 안목으로 풀어가자는 취지로 화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둑'이라는 공통분모를 확인한 문 대통령과 리 총리는 한중관계 개선에 대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이어갔다는 후문이다. 이번 회담은 예정시간인 30분을 훌쩍 넘긴 50분 동안 진행됐다.
다만 문 대통령이 ▲중국내 한국기업이 생산한 배터리 보조금 제외 철회 ▲한국산 제품에 대한 반덤핑 수입규제 철회 ▲미세먼지 공동대응 ▲원-위원회 직거리시장 발전과 양국 금융협력 추진 등 요구사항을 쏟아내자 내색하지 않았지만 진땀을 흘린듯 리 총리가 농담조로 "(다음달 방중하면) 다른 얘기는 하지 말고 바둑 얘기만 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의 다양한 요구에 대해 리 총리가 대부분 즉답을 피하긴 했지만 청와대는 "100점 만점에 100점"이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은 마음이 급하지 않냐. (중국이 사드 제재를) 빨리 풀어주면 좋은 것이기 때문에 리 총리를 만나 '하나라도 더 빨리 풀어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라며 "이에 대해 리 총리가 대국적인 견지에서 이 문제를 풀어가자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