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움푹 팬 눈에서 눈물 뚝뚝…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그 이후 ② "적군 핏줄 라이따이한" 한국군 성폭행 피해자의 주홍글씨 ③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베트남의 '한국군 증오비' ④ "책임지지 않는 건 일본과 닮아"…베트남학살 법정에 선다 |
베트남전쟁에서 군인들의 성폭력으로 인해 태어난 한국계 혼혈인들은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차별과 멸시는 물론 '적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신랄한 비난까지 시달리며 지내고 있다.
◇ "'따이한' 소리에 친구들도 도망갔다"
지난 2일 평화기행단을 만난 낌은 "아픈 얘기지만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역사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려줄 수 있느냐"는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상임이사의 조심스러운 질문을 듣고서 왈칵 눈물부터 쏟았다. 곧이어 낌이 용기를 내고 입을 떼자 현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낌은 "학교에 가면 친구들은 나를 항상 '라이따이한'이라고 불렀다"며 "'우리는 미국하고 싸웠는데 쟤는 왜 한국인이야?' 하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이어 "아이들이 몰려와 '따이한' 하고 부르면, 잠시 어울려 놀던 몇몇 친구들도 도망가버렸다"면서 "그럴 때면 너무 치욕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말했다.
'따이한(대한)'은 베트남인들이 한국인을 이르는 말이며 '라이'에는 혼혈잡종이라는 경멸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처럼 어린 낌은 적군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주변의 손가락질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낌을 낳은 어머니 역시 평생 주변 사람들로부터 "매국노다", "따이한하고 붙어먹었다"라는 지탄을 받고 살아왔다고 낌은 전했다. 어머니는 이후 베트남 사람을 만나 아이까지 낳았지만 집안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다.
◇ 2세, 3세까진 이어진 '생활고' 대물림
특히 부족할지언정 평등하다는 공산주의 사회의 '배급'에서까지 차별을 받았다. 식량이 떨어져 한때 죽 한 그릇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적이 많았다고 낌은 털어놨다.
성인이 돼서는 시댁의 극심한 반대를 뚫고 어렵사리 결혼에 성공했다. 앞서 교제했던 전 남자친구의 집에서는 "저런 엄마의 딸을 어떻게 집안에 들이냐"며 거절당했던 터라 "이제는 팔자가 좀 나아질까"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생활고는 계속 심해져만 갔고 외려 최초 성폭행 피해자의 3세인 낌의 자식 세대까지 대물림되고 있다.
낌의 둘째 딸 투이응언(26)은 "저희집은 항상 마을에서 가장 가난했다"며 "엄마는 늘 멀리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엄마랑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어려웠다"고 밝혔다.
다만 "저는 쌍꺼풀도 있고 생김새가 크게 다르지 않다 보니 친구들이 라이따이한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한다"면서 "사람들이 물어보지 않으니 굳이 먼저 얘기하지도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낌은 현재 베트남정부가 극빈층에게 제공하는 복권을 팔면서 그나마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를 당해 머리와 다리를 심하게 다친 뒤부터는 유치원 식당보조로 근무하고 있다.
◇ "절반은 한국인…자랑스러워하고 싶다"
부산대 조흥국 교수가 2000년대 초반 베트남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라이따이한을 최소 5천 명에서 최대 3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개략적으로 추산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 국방부는 현재까지 한국군의 성폭행 문제는 사실관계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고 당분간 별도의 조사계획도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낌은 "주변에서 늘 '너는 절반은 꼬레안(한국인)인데 강대국인 한국이 아무것도 안 해주냐, 왜 그 모양으로 사냐'고 비아냥거린다"며 "나도 언젠가 내가 라이따이한이라는 걸, 반은 한국인이라는 걸 자랑스러워 하는 삶을 살고 싶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