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바뀌니 작품 들어와…이제 다시 '상식'으로"

[인터뷰] '터널' 원작자 소재원 "블랙리스트? '바른생활'서 뭘 배웠길래"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달 17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개입 혐의에 대한 항소심 첫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노컷뉴스)
문화예술인들이 정치적 견해로 차별받지 않도록 한 문화기본법 개정안, 이른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지원 배제 명단) 방지법'이 최근 국회를 통과하면서, 지난 정권의 시대 착오적인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낸 블랙리스트 파문이 다시 한 번 회자되고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널리 알려진 소설 '터널' '소원' 등으로 그간 한국 사회 부조리를 파헤쳐 온 소설가 소재원(35)은 블랙리스트 사태를 두고 "처음 접했을 때는 의심이 앞섰다"고 운을 뗐다.


"'그것(블랙리스트)을 과연 정부에서 만들었을까?' '언론이 과장 보도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었죠. 말도 안 되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으니까요. 그랬기에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 애쓰다가, 박근혜 정부 시절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의 개입 혐의 등이 속속 나오는 것을 보면서 비상식의 세상에 눈앞이 깜깜해졌죠."

소재원은 13일 CBS노컷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정치는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며 "그런데 블랙리스트가 나왔을 때는 '내가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는 것이 맞나'라는 충격에 빠졌다"고 회상했다.

앞서 국회는 지난 9일 본회의를 열고, 기존 문화기본법 제4조(국민의 권리)에서 '모든 국민이 문화활동을 할 때 차별받지 아니할 사항'으로 규정한 '성별' '종교 '인종' '세대' '지역'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나 신체적 조건' 등에 '정치적 견해'를 추가한 개정안을 의결했다.

1983년생인 소재원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모습을 상식으로 여기면서 커 온 젊은 세대다. 하지만 그가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벌이던 지난 10년은 비상식이 상식을 집어삼켜 버린 '극단의 시대'였다.

그는 "우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바른생활'이라는 과목을 배웠다"며 "저는 그것을 통해 '모든 일은 가장 밑바탕에 있는 상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머릿속에 새겼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때 '바른생활'로 배운 상식은 '양보하고 나눈다'는 개념이잖아요. 자라면서 윤리, 도덕 등 더 차원 높은 철학을 접하는 데는 우리가 어릴 적 배운 바른생활의 가르침을 보다 논리적으로 체계화하고 설득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점에서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제가 자라면서 배워 온 상식에서 벗어나도 너무 많이 벗어난 시대였죠."

◇ "영화 '터널' 개봉 당시 세월호 메시지 숨겨야 했던 절망감"

소설가 소재원(사진=소재원 제공)
소재원은 지난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정권이 벌인 상식 밖의 일을 두고 "이게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라고 되묻고 싶다"는 말로 절망감을 표현했다.

"(정권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자유민주주의 아래 보장된 평등의 기회, 표현의 자유 등을 억누르는 행태는 왜 벌였는가라고 되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왜 그들의 집권을 허용했을까요? 상식을 벗어난 범주 안에서 그들이 내세운 논리에 취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는 "극소수의 권력층이 문화예술인을 억누르기 위해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지원에서 배제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영화나 소설 속 일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다"며 "우리 앞에 이러한 부정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펼쳐졌다는 것은 몹시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진단했다.

소재원은 "그러한 터무니없는 통제 안에서 솔직히 저 역시 상식적인 글을 쓰고 말을 하면서도 자기검열과 맞닥뜨렸던 경험이 있다"고 털어놨다.

"제 소설 '터널'이 영화로도 소개됐을 때 누가 봐도 세월호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영화 개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메시지를 숨겨야 했죠. 세월호를 연상시킨다는 이야기가 돌면 상영관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걱정을 했던 거죠. 세월호를 연상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인터뷰를 하라는 지침도 있었으니까요."

이어 "현재 정치를 다룬 드라마 각본을 의뢰받아 쓰고 있다"며 "표현의 자유가 보장 받는 시대가 됐다지만, 그 시간이 얼마 안 된 만큼 소속사 측에서는 여전히 두려움을 안고 있는 부분도 있다. 여전히 움츠려 있는 상황인 것은 맞다"고 부연했다.

◇ "정치보복 논리 펴기 전에 상식 선에서 스스로 되돌아보길"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 12일 영종도 인천공항에서 바레인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과 관련 입장을 밝히고 출국장으로 향하던 중 한 기자의 질문에 돌아보며 "질문 같은 질문을 해야…"라고 말하고 있다. 이날 이 전 대통령은 "이러한 것(적폐청산)은 국론을 분열시킬 뿐 아니라 중차대한 시기에 안보외교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전 세계 경제 호황 속에서 한국 경제가 기회를 잡아야 할 시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진=윤창원 기자/노컷뉴스)
소재원은 "아닌 것을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겼다는 것은 굉장히 비상식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며 강한 비판을 이어갔다.

"최근 현 정부의 적폐청산 의지를 두고 '정치보복'이라고 얘기하는 세력이 있어요. 그들이 정치보복 논리를 펴기 전에, 과연 국가기관이 반민주적인 행태를 벌인 것이 옳은가라는 상식적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토론하기 시작한다면 이처럼 기본에서 벗어난 엉뚱한 정치보복 논리는 나올 수가 없는 거죠."

소설가로서 소재원은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상식에 바탕을 둔,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작품을 꾸준히 내놓는 것이 제게 주어진 역할"이라며 "상식의 시대가 도래한 만큼 제 작품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시 한 번 도약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솔직히 지금까지 두려움 탓에 쓰지 못했던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고 제게 작품 의뢰가 여럿 들어오고 있어요. 제 마음속에 있었지만 정작 다루지 못했던, 누구도 손을 내밀 것 같지 않아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작품들에 벌써 투자가 들어오고 있어요."

그는 "영화, 드라마 부문에서도 정권이 바뀐 뒤 정말 많은 것을 시도하려는 모습에 놀라고 있다"며 "지난 시절이 정말 심각했다는 점을 새삼 절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당장 계약한 작품이 두 편입니다. 하나는 페미니즘 시각에서 여성을 이야기하는 작품, 나머지는 현재 우리나라 정치의 탐욕적인 민낯을 꼬집는 작품이죠. 우리네 인식이 다시 상식의 범위 안으로 모아질 수 있는 작품을 할 수 있다는 데 너무 새롭고 행복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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