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노조는 8일 고대영 KBS 사장과 만난 자리에서 용퇴를 요구했고, 이때 고 사장이 "여야 정치권이 방송독립을 보장할 방송법 개정안을 처리하면 임기에 연연하지 않고 사퇴하겠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고대영 사장 퇴진과 방송법 개정 2가지를 내걸고 지난 9월 7일부터 파업을 해 온 KBS노조는 고 사장이 '사퇴' 의사를 비친 것이 처음이라며 "미흡하지만 방송법 개정을 통한 사장 퇴진과 공영방송 정상화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라 평가했다.
고 사장이 자진사퇴의 조건으로 든 '방송법 개정안'은 지난해 7월 21일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의원 외 162명의 의원들이 발의한 '방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말한다.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뿐 아니라 무소속 의원들까지 발의에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시청자가 아니라 정치권의 영향에 휘둘리는 현재 공영방송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시급한 문제의식이 반영된 장면이기도 했다.
◇ '방송법 개정안'에 담긴 내용은
'방송법 개정안' 제안이유에도 현재 공영방송 지배구조의 한계가 잘 나타나 있다. 현행법에 의하면 KBS 사장은 KBS이사회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KBS이사회 역시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가 추천하면 대통령이 임명한다.
방통위원 5명 중 위원장 포함 2명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3명은 국회가 추천하는데, 대통령이 소속되거나 소속됐던 정당 교섭단체와 그 외 교섭단체가 각각 1명, 2명 몫을 가져간다. 즉, 정부여당 추천 몫이 절반 이상인 구조다.
이 때문에 '방송법 개정안'은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과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KBS이사회 구성 및 KBS 사장 선임 절차의 공정성·객관성 보장 장치를 법적으로 마련한다는 취지로 마련됐다. 또한 방송법뿐 아니라 MBC 대주주이자 관리감독기구인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의 법과 EBS이사회와 관련된 한국교육방송공사법도 개정안이 올라와 있는 상태다.
이밖에도 △방송사 재허가 심사 시 방송편성규약 제·개정과 준수 여부, 편성위원회 설치 및 의결사항 준수 여부를 심사항목에 추가 △지상파·종편·보도전문채널은 편성위원회 추천으로 시청자위원회 위원 위촉 △이사회 기능에 사장 임면제청과 사장추천위원회 구성 관련 사항 추가 △이사 및 집행기관은 내·외부 부당 지시나 간섭 받지 않고 정치활동에 관여할 수 없게 함 △이사회는 회의 속기록·녹음기록·영상녹화기록이 첨부된 회의록을 작성·보존하고 홈페이지 등을 통하여 공개(비공개 의결 안건은 제외) 등이 요지다.
처벌 조항도 있다. 이사 또는 집행기관(KBS 경영진)이 정치활동을 하거나, 편성위원회 제청 없이 방송편성책임자를 선임하는 자, 방송편성규약을 준수하지 않는 자, 편성위원회 구성을 하지 않거나 방해하는 자, 회의 공개 또는 회의록 공개 규정을 위반한 자 등을 처벌한다는 내용이다.
◇ 법안 계류 앞장섰던 자유한국당, 왜 '방송법 개정' 앞장서 외치나
법안 발의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은 '방송법 개정안' 처리에 미온적이었다. 새누리당 소속인 신상진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이하 미방위, 현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과 박대출 미방위 간사가 중심이 되어 원활한 논의를 방해했다.
지난해 임시국회가 종료될 때까지 미방위 회의는 제대로 열리지도 않았고, 올해 초에도 새누리당 의원들이 전원 불참해 미방위 법안심사소위는 파행 상태였다.
새누리당 정우택 원내대표는 지난 2월 "'방송법 개정안'은 기존 방송계를 흔들어 놓고 야당과 노조의 방송장악으로 이어질 게 불 보듯 뻔하다"며 노골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진 후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조기대선이 치러져 정권이 바뀌고 나서도, '방송법 개정안' 관련 논의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MBC 대주주 방문진에서는 '극우 스피커'로 평가받으며 자유한국당의 비호를 받았던 고영주 이사장이 불신임됐고, 야권 이사 2명이 자진사퇴해 현 여권 이사들이 우위에 섰다. 더구나 김장겸 MBC 사장의 해임안까지 올라가 표결을 코앞에 두고 있다. KBS이사회 역시 야권 이사 1명이 자진사퇴했다.
자유한국당 입장에서는 공영방송 이사회 내 구도가 현행 7:4에서 개정안을 통해 7:6으로 바뀌는 것은 '야당'이 된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이기도 하다. 일단 법안을 처리한 후 인사를 하자는 자유한국당 등 야3당의 기조는 그대로 고대영 KBS 사장과 KBS노조에게로 이어진다.
이에 새노조는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KBS노조의 결정이 자유한국당 등 야당들의 입장과 너무나 판박이라는 점"이라며 "지금의 국회 상황을 감안하면 방송법과 여야 대치 법안이 국회에서 신속히 처리될 리 만무하지 않은가. 방송법 통과시기를 전혀 가늠할 수 없다"고 KBS노조의 파업 중단에 유감을 표한 바 있다.
한때 더불어민주당과 뜻을 같이 했던 국민의당이 자유한국당과 뭉치게 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국민의당 김동철 원내대표는 3일 "과거 정권 방송장악과 마찬가지로 민주당 역시 코드인사를 통해 방송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언론개혁' 요구와 공영방송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변화를 두고 '방송장악'이라고 규정한 것은 자유한국당과 같은 기조다.
◇ 말 아끼는 더불어민주당, 야3당에 '야합' 비판한 언론시민사회
법안 발의 당시부터 올해까지 '방송법 개정안' 통과를 주장했던 더불어민주당의 입장도 과거와 달라졌다. 법안을 대표 발의했던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수석부대표는 3일 "공영방송 정상화와 방송법 개정 문제는 별개"라며 "공영방송 정상화는 규정에 의해 바로잡는 절차를 밟는 것으로 정치권이 감 놔라 배 놔라 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이 같은 입장 변화에도 역시 정치상황이 연결돼 있다. 법안 발의 당시만 해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전면에 드러나 있지 않은 '평시'였고, 정부여당의 협조 없이는 법안 통과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방송법 개정안'은 여야 합의를 이룰 수 있는 이른바 '최저선'으로 내용이 구성돼 있다는 게 지배적인 해석이다.
예를 들어 공영방송 이사회 인원을 13명으로 하되 여야를 7:6 비율로 하는 것과 특별다수제 도입은 19대 국회 때 방송공정성특위 자문위원회가 합의한 내용이다. 자문위원회는 여야가 추천한 학자 동수로 구성돼 있었다. 여당(새누리당)이 추천한,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위원들조차 이 사안들에는 동의한 것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김환균, 이하 언론노조)가 최근 야3당의 합의를 '야합'이라고 혹평하며 공세적으로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언론노조는 "현재 국회에 제출돼 있는 법안을 포함해 지난 수 년 동안 토론해 온 과정을 토대로 성실하게 논의해나가야 한다. 특히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터져 나온 국민들 '언론 적폐 청산, 공정언론 실현' 요구를 충실히 반영하고, 이번 기회에 정치권이 언론에 개입하거나 장악할 수 없도록 '정치적 독립'을 온전히 보장하는 방향으로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동원 언론노조 정책실장은 "법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뿐만 아니라 어떤 시점에 요구가 나왔고 어떤 과정을 거쳐 완료되느냐도 중요한 부분"이라며 "당시 방송법 개정 요구가 나왔던 이유는 현행법보다는 조금이라도 균형 있는 구조를 만들자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김 실장은 "하지만 국정농단이 드러나고 정권이 교체됐다. 박근혜 대통령을 탄생시킨 새누리당(자유한국당)과의 '합의'에 초점을 맞췄던 법안이 아니라, 보다 진보적이고 정치적 중립성을 담보하며 시청자 참여를 보장하는 '새로운 방송법'을 논의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실제로 촛불정국에서 언론은 재벌, 검찰과 함께 적폐청산 되어야 할 주요 대상으로 꼽힌 바 있다.
또한 김 실장은 현 야3당의 합의가 △야당으로서의 정체성을 부각하려는 정치적 셈법에 가깝고 △법안 처리 여부가 불투명해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현재 KBS-MBC 경영진 체제의 수명을 연장시키며 △국회에 올라있는 안보다 후퇴한 내용으로 통과를 추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정의당 추혜선 의원과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 언론시민단체들이 새로운 방송법 개정안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