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아닌 아이들…80만명 ② 'IQ 76' 은주는 어쩌다 거리를 헤매게 됐나 ③ 사기대출에 성폭력 당해도…"장애인이 아니어서" |
정은씨는 "지인을 따라 서울로 갔는데 물품도 구매해야 되고, 방도 구해야 된다며 대출업체를 소개해줬다"며 "6개월 정도 있다 간신히 나왔는데 빚은 고스란히 남았다"고 말했다.
영수(가명·20)씨 역시 자신의 명의로 휴대폰을 개통해 지인에게 넘긴 뒤 기기값과 요금을 대신 내고 있다. 지인이 쓴 소액결제까지 겹쳐 상당한 채무가 생겼지만 역시 속만 앓고 있다.
정은씨와 영수씨는 '경계선지능'을 갖고 있다. 지능지수(IQ) 70에서 85 사이, 정상지능과 지적장애 사이의 상태로 학습능력과 사회성 등이 부족해 일상생활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고 있다.
피해를 구제받기 위해서는 의사결정 과정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지적장애로 분류되지 않은 만큼 표면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여 쉽지 않은 상태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의사능력이 결여돼있다면 계약행위를 취소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만 민사적인 재판 과정을 거쳐 이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문제"라며 "장애진단도 받아야 하고 법률적인 조언도 필요한 만큼 혼자서 하기에 녹록치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성인인 이들의 의사결정 자체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때때로 재정적으로 손대기 어려운 수준까지 가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돈을 주고받은 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거나, 기억력 자체에 한계가 있다 보니 증언의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여겨져 증거불충분으로 빠져버리기도 한다고 한다.
집을 나온 뒤 남성들에게 속아 성관계를 맺은 경계선지능 청소년이 장애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성폭행이나 의제강간이 아닌 '성매매' 판결을 받은 사례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경계선지능 청소년이 범죄에 이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경계선지능인 지현(가명·17)이는 또래 가출팸에게 이용당해 성매매와 차량 절도 등에 손을 댔다.
비행과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들을 법원을 통해 위탁보호하고 있는 청소년 회복센터의 이해경 센터장은, 보호 중인 청소년들 가운데 이 같은 사례가 드물지 않다고 말한다.
이 센터장은 "'오빠'나 '삼촌'들이 친절하게 대해주면 거의 100% 넘어간다"며 "자기가 성매매에 이용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친구도 봤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모양새"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김성식 대전가정법원 판사 역시 "자신의 행동이 반사회적인 행동이고 비행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며 "법원에서도 이 같은 청소년들에 대한 진단을 정확히 하고 교육 프로그램 마련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계선지능을 가진 아동·청소년이 정상지능은 물론 지적장애 아동·청소년보다도 성폭력 피해에 침묵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배승민 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인천 해바라기아동센터 성폭력 피해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경계선지능 10명 중 2명꼴인 20%만이 피해 사실을 스스로 폭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정상지능의 피해 응답률 63.7%은 물론, 지적장애의 응답률 50%보다도 낮은 수치다.
배 교수는 "지적장애 아동·청소년에 대해서는 범죄예방 교육 등에 관심이 높지만, 경계선지능의 경우 오히려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