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중 형사들의 소탕 대상이 되는 '흑룡파'는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악랄하고 잔혹한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빡빡 밀어버린 머리와 강렬한 눈빛으로 '씬 스틸러'라는 별명까지 얻은 배우가 있다. 바로 진선규다.
그는 장첸이 이끄는 흑룡파의 2인자 위성락 역을 맡았다. 각종 집기를 때려 부수고, 룸살롱에서 여성에게 달려들며, 적이라고 판단되는 사람에게는 온갖 방법으로 고통을 주는 역할이었다. '범죄도시'가 입소문을 타고 더욱 더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배우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진선규는 단연 손꼽히는 '기대주'가 됐다.
지난달 31일, 서울 양천구 목동 CBS 사옥에서 배우 진선규를 만났다. 처음 인사를 나눈 순간 두 가지에 놀랐다. 삭발에 가까운 짧은 머리가 아닌 평범한 길이의 헤어스타일과 무척 조곤조곤하고 조용한 말씨. 실제의 진선규는 영화 속에서 에너지를 발산해 내는 위성락과는 딴판이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 '범죄도시'가 '타짜'를 꺾고 청불 영화 흥행 4위에 올랐다. 소감이 궁금하다. 인기를 실감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 인터뷰를 진행했던 10월 31일 기준, 11월 8일 현재 '범죄도시'는 640만 관객을 돌파, 역대 청불 영화 흥행 3위로 올라섰다)
저는 촬영 때문에 무대인사를 거의 못했다. 10월 개봉 전에 한 번 하고 그 뒤로는 전부 촬영이 있어서… 되게 분위기 좋다는 말을 전해 듣기만 했다. (웃음)
▶ 이렇게까지 잘 될 거라고 생각했나.
사실은 전혀 예상 못했다. 메이저급의 투자사나 배급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희 나름대로는 진짜 손익분기점만 되면 성공한 거 아니냐 했는데, 관객분들이 정말로 잘 봐 주신 것 때문에 입소문이 나서 지금까지 오게 됐다. 기적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든 다 어느 방향에든 다 '고맙습니다' 해야 된다. (웃음) 진짜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 600만 가까이 되는 것도 너무나도 감사드린다, 관객분들께. 저희도 저희 나름대로 재미있게 좋게 만들었고, 그게 이렇게 흥행한 것 자체로도 너무 그냥 행복하고 좋다. 그런 순간으로 계속 지금 시월 한 달은 정말 즐겁게 보냈는데 주혁이 형 사고가 생기는 바람에 좀 조심스럽다.
▶ 故 김주혁과 같이 드라마 '무신'을 찍으며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고 있다.
5~6개월 같이 고생하면서 찍었다. 주혁이 형을 거의 계속 옆에서 보필하는 역할이었는데 진짜 힘들었다. 매일 말 타고 밤새 찍고 그랬는데 형은 힘든 거 티 잘 안 내시고 도리어 분위기 좋게 하려고 아재개그도 많이 하시고 개구쟁이 같았다. 이걸(인터뷰를) 하고 나서 빈소에 가려고 한다. 저도 아직 너무 믿기지 않는다.
저는 오디션 처음에는 떨어졌다. 위성락 역할로 했다가. 이미지가 너무 선하기도 하고, 그런데 이게 사실 제 모습이다. (웃음) 감독님이 정확하게 듣고자 하는 말, 필요한 말을 첫 오디션 때 좀 부족하게 했다. 그래서 떨어졌다가 다른 역할로 오디션을 다시 볼 기회를 주셨다. 그때 '이 역할은 굉장히 준비를 잘 해 오셨네요' 하고 좋게 보셔서 기다리고 있는데 위성락으로 붙어서 '진짜? 진짜?' 이랬었다.
이후에 감독님하고 같이 의상팀, 분장팀이랑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잘 안 되는 거예요. (웃음) 머리를 자르기 전에는. 이미지가 안 나오니까 '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불안해했다. 그래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분장실 가서 머리를 즉석에서 깎았다. 처음에는 깎았는데도 (딱 맞는 이미지가) 안 되면 어떡하나 싶어 1/3은 남겨두고 잘랐다. 그러다 완전히 빡빡이로 깎았는데 그때 '오, 됐다!' 하면서 의상도 분장도 맞춰진 거다. 그 순간에 캐릭터 이미지 구축은 거의 다 했다. 신의 한 수였다, 머리 깎았던 게.
그동안 매체로 보인 배우로서의 제 모습은 평범하고 선한 이미지여서 난 이런 이미지를 가졌구나 했는데, 머리를 깎고 난 뒤에 '아, 나한테 이런 이미지도 있구나' 했다. 배우로서 저를 다시 돌아봤다. 저도 충분히 변할 수 있는데 변화를 너무 두려워했던 건 아닐까 싶었다. (잘 돼서) 지금 너무나도 좋고, 행복하다. (웃음) 이 정도의 파급효과가 있을지는 몰랐다.
▶ 위성락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했나.
연기적으로 위성락을 봤을 때는 '그 누구도 무섭지 않은 사람'이었다. 눈빛을 어떻게 해야지 이런 외형적인 것보다는 정말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라는 설정에 충실했다. 우리 조직에서도 장첸(윤계상 분)과 양태(김성규 분)가 있지만 그냥 내가 더 잘해! 이런 마음이었다. 인물의 외형적인 건 분장, 의상팀에서 만들어주셔서 저는 그 사람의 사고를 읽어나가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연기를 시작하면서 배우고 쌓은 제 노하우였는데, 그게 카메라 앵글에서 잘 보였던 것 같다. '난 너 이길 수 있어' 하는 그런 자세가.
시나리오가 계상이가 맡은 장첸 위주의 시나리오였다. 셋이 다 캐스팅되고 나서는 연변 말을 해야 되기 때문에 원래는 선생님을 주 1회 만났다. 그러다 '너무 어렵다. 주 3~4회는 만나야 된다' 이러면서 미친 듯이 연습했고, 어느 정도 연변 말을 숙지했을 때 저희들끼리 씬 하나하나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지 우리 세 명이 무서울까 생각했다. (시나리오에서) 장첸은 무서운 사람이다. (위성락은) 시나리오 상에서는 얼굴로 보기엔 되게 강한데 수하 같은 느낌이었다. 마약을 갖고 돌아와서 거래하는 장면도 원래는 장첸이 저를 약한 2인자 같이 대하면서 막 때리는 거였다. 그러다 계상이가 너무 좋은 생각을 한 거다. 자기 혼자 잔인하고 나머지가 수하로만 있으면 그건 어디서 많이 본 캐릭터가 되고, 결국 위성락과 양태는 잘 보이지 않게 되니 셋이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계상이가 팀워크를 만들자며 원래 있던 자기 분량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세 명이 분업을 해서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쪽으로 연기했다. 계상이가 해야 될 액션들도 저희한테 다 나눠주고, 계상이는 (저희를) 지켜보고 어느 정도 허용해주면서 세 명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때 팀이 이뤄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장첸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연변 조폭 3명이 이 영화에서 동등한 나쁜 놈으로 가게 된 건 계상이 아이디어였다. 주인공으로서 전체의 그림을 그리고 가져가려는 마인드가 있었다.
위성락이 경찰에 붙잡혔다 돌아오는 장면이 있다. 장첸은 자신이 믿는, 실력 있고 어쩌면 자신보다 더 셀 수 있는 인물이 돌아오자 밥을 사겠다고 한다. 위성락은 대우 받으니까 너무 좋은데, 나중에 장첸이 거래 내용을 듣고 뒤집어엎지 않나. 그때 양태는 (장첸이 위성락을) 죽이라고 하면 죽여야 되는데 쉽게 내키지 않아 한다. 그 순간 저희 세 명의 어떤 선이 탁 그어져버린 것 같았다.
감독님도 OK하셨다. (웃음) 처음에 저희가 (웃음) 크랭크인할 때까지 연습을 계속 했다. 감독님께 가서는 콘티 말고 이렇게도 생각해 봤다면서 발표를 했다. 씬마다 여러 가지 버전을 연습했다. 장면을 현장에서 보여드리면 분위기가 '오, 좋은데?' 이렇게 된 거다. 한 회 두 회 지나가면서 소문이 났다. 흑룡파는 계속 연습을 하면서 씬을 풍성하게 만들어온다고.
(강 감독은) 늘 가면 '또 어떻게 했어?'라고 물어오셨고, 자기가 갖고 있는 큰 그림에서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정리해 주셨다. 현장 분위기가 되게 좋았다. (저희가 준비한 연기를 보려고) 모니터에 붙어있는 사람도 많았다.
감독님이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절실했던 사람들을 뽑았던 이유는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뭘 잘한다'고 하면 좋은 자극으로 돌아왔다. 형사팀 연기할 때 우리도 가서 모니터링했다. (저쪽 분위기가)즐겁고 재밌으니 우린(악역은) 더 나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감독님은 흑룡파는 전사(과거 이야기)가 있기보다는 무조건 나쁜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형사팀은 나쁜 놈들을 때려잡을 만한 힘을 갖고 있지만 어떻게 할 줄 모르고, 결국 두 기둥의 싸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영화를 시사회에서 처음 봤을 때 '감독님 정말 똑똑하시구나' 했다. 어떤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것들을 적재적소에 넣었더니, 영화가 움켜졌다 펴졌다 했다. 너무 잔인하지도 않았고 무섭다가도 재밌었다. 와, 감독님 우리를 정말로 잘 요리하셨구나 싶었다.
▶ 잔인한 상황들이 자주 나옴에도 불구하고 그런 장면을 지나치게 부각한다거나 오래 끌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안 해도) 조이는 느낌이 드니까. 굳이 그렇게 가지 않아도 분위기를 잘 만들어주셨다. 룸살롱에서 팔 자르는 것도 가까이서 보여줘야 한다, 말아야 한다 갑론을박이 있었다.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관객들이) 상상하는 힘이 생기지 않았을까. 청불이지만 너무 혐오스럽지 않고, 약간 공포영화 보듯이 긴장했다가 풀리고 그런 전개였다.
▶ 흑룡파는 사람을 해하거나 죽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무도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왜 이들이 이런 짓을 저지르는지 과거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데, 이런 전개 방식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연습하면서 배우로서 당연히 묻게 되지 않나. 장첸은 왜 이런 작업을 여기서 하려고 하느냐. 왜 돈을 모으려고 하나 등등. 그런데 감독님이 딱 잘라서 "그냥 나쁜 놈이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하시더라. 처음에는 어? 싶었다. 어떤 게 '나쁜 놈'이지 고민했는데, (촬영) 회차가 지나면서 (전사가) 없는 게 너무 좋더라. '네가 우리를 건드려? 그러니 지금 당장 너를 죽일래' 이렇게 해 버리니까 완전 더 나쁘게 보이게 됐다. (흑룡파 셋의) 힘이 커지면서 형사쪽도 기세가 올라오게 됐고. 편집본을 보니 군더더기 없이 더 재밌어졌더라. (악인들에) 동기부여를 하기보다는, "저 놈들(흑룡파)을 잡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게 만든 것 같다.
(노컷 인터뷰 ② '범죄도시' 진선규 "캐릭터 위해 머리 민 게 신의 한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