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년생'으로 미성년의 나이에 입대를 한 여군 A(당시 18) 씨에게 군대의 벽은 높기만 했습니다.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 좀 써라"
"지휘관에게 매일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면 해결될 거다"
"정신교육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근데 혹시... 사단장님께 보고할 거냐"
상관으로부터 수십차례 성추행을 당하고 2차 피해까지 입은 A 씨가 참다 못해 상부에 문제를 제기했을 때 돌아온 답변들입니다.
상부에 진정을 제기하는 것을 마지막 구명줄로 여겼던 A 씨는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온 몸에 맥이 풀리고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고 합니다.
고작 '각서' 하나로 성범죄를 없던 일로 덮으려 하는 대대 주임원사,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정신교육'이면 충분할 것이라 여긴 가해자의 지휘관, 성범죄에 따른 2차 피해를 정식으로 문제제기 하지 않은 채 '문안인사' 정도로 상황을 무마하려했던 양성평등상담관, 피해자인 A 씨에게조차 '규정상의 이유'로 사건 조사 내용을 철저히 비공개에 부쳤던 사단 감찰부까지.
이같은 폐쇄적인 군대 조직이 가해자들에게 내린 통보는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 위장된 평화였습니다.
A 씨는 불안장애와 우울장애를 진단받은 후 매일 정신질환 약을 달고 삽니다. 약을 한움큼 먹고 나면 무기력하고 멍해서 운전을 하다가고 정신을 놓곤해 함부로 운전대를 잡지 못한다고 합니다.
왼쪽 손목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흔적이 남아있고 허벅지에는 아직도 자해의 상흔이 선명합니다.
같은해 3월엔 성폭력 근절 종합대책은 마련하면서 성범죄 신고 전용전화를 운영하고 인트라넷 상담 창구도 신설했습니다.
성폭력 문제에 대한 이같은 군의 제도적 보완도 물론 앞으로도 계속돼야 합니다. 하지만 여군 A 씨의 잔혹사는 이같은 제도들이 군대의 폐쇄적인 조직문화 앞에 사실상 무용지물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범죄를 은폐·축소하려고만 한 부대 지휘관들과, 조사 결과에 반박하는 피해자에게도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육군 '규정'까지.
여군은 갈수록 늘어 1만 명에 달하는데 이들에게 군이 입만 열면 외치는 선진병영 꿈은 요원해보이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