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성가형 재벌이자 유나의 약혼자인 임태산(최민식 분), 유나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는 태산의 딸 미라(이수경 분), 사건의 결정적 증거가 될 만한 CCTV 영상을 가진 유나의 팬 김동명(류준열 분), 태산그룹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는 원칙주의자 검사 동성식(박해준 분), 유나와 미라, 태산의 곁에 오래 머물렀던 비서 정승길(조한철 분)까지. 허투루 지나칠 사람이 없다.
여기에 더해, 박신혜가 있다. 박신혜는 미라 과외선생님으로 태산그룹과 인연을 맺어 신뢰받는, 나아가 미라의 변호인이 되는 최희정 변호사 역을 맡았다. 섬세한 연출로 정평이 난 정지우 감독은 '침묵'에서 많은 이들의 처지와 감정이 얽혀드는 판을 깔았고, 최희정이라는 캐릭터를 두고 박신혜에게 "가장 연기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박신혜는 도전했다.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배우 박신혜의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됐다. 작품도, 배역도 만만치 않았던 '침묵'에 합류하게 된 이유부터 들어 보았다.
◇ "최민식 선배님과 함께하는 작업이 굉장히 설렜다"
'침묵'은 '해피엔드'(1999) 이후 18년 만에 정지우 감독과 배우 최민식이 다시 호흡을 맞춘 것 때문에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다. 배우라면 한번쯤 꼭 작업해 보고 싶다는 말로 확인할 수 있듯 업계 신망이 높은 최민식이 나온다는 점은, 박신혜에게도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작품 합류 계기를 묻자 바로 "최민식 선배님과 함께하는 작업이 굉장히 설레고 궁금했다"는 답이 나왔으니. 긴장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스크린 속에 선배님과 투샷이 잡혔을 때 제 모습을 관객분들께서 어색해하지 않을까 했다"며 고민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최희정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개성도 마음에 들었다. 박신혜는 "다른 캐릭터의 선이 명확하고 굵다면 희정이의 선은 얇다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에 놓여 있지만 거기에 발 담그는 캐릭터는 아니라고 봤다"고 말했다.
이어, "정지우 감독님의 섬세한 연출력을 지금 제가 경험해 본다면 다른 영화를 하더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고 덧붙였다.
◇ 박신혜가 분석한 '침묵' 최희정
최희정은 영화에서 자주 헤매는 캐릭터다. 거의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과 엮임에도 감정선이 완벽하게 또렷하지 않았다.
박신혜는 "임태산과 갑을관계도 있었고, 미라와는 과외선생님이었고 동성식 검사는 옛 연인"이라며 "인간관계에서 생겨나는 얽히고설킨 미묘한 관계 중심에 희정이 있어서 사건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정 감독 또한 "희정이가 가장 연기하기 어려울 거예요"라고 대놓고 말했다. 하지만 그 지점에서 박신혜는 흥미를 느꼈고, 많은 상의 끝에 최희정 캐릭터를 완성시켰다. 그러면서 "감독님이 잡아준 길로 잘 갔다"고 덧붙였다.
"저는 (감독님의 의중을) 캐치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하면서 자신감이 떨어져 있을 때가 굉장히 많았다. 희정이라는 캐릭터도 굉장히 무기력하지 않나. 큰 사건의 압박에 무엇이 정답인지도 모르고 휘말리지만 자기 신념을 지키고자 꿋꿋이 버티는 건데, 그런 희정이가 '이게 정답이다!' 해서 한 번에 터진 장면이었다."
감정 연기뿐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도 신경을 썼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대로 퍼질러지는 장면이나, 태산그룹에서 법적대리인을 의뢰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의 사건을 담당하며 긴 시간을 전화통 붙잡고 사는 변호사. 어떻게 해야 제일 현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박신혜는 한쪽 어깨에 전화기를 끼운 자세를 택했다.
'생활감'을 강조한 정 감독의 방향 설정에 충실히 따랐단다. 그는 "활동적이고 건강하고 통통 튀는 이미지는 가졌지만, 생활감은 조금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었다"며 "그 사람들의 삶을 살아보지 않아 어색하지만 우리는 그 '익숙함'을 표현해야 하는 사람들이지 않나. 제 상상력으로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을까 과제를 받아 풀어나갔던 것 같다"고 말했다.
◇ '침묵' 최희정과 실제 박신혜는 얼마나 닮았을까
정의에 대한 자기 신념이 있고, 그 신념을 지키고자 성공의 길 대신 구청에서 홈케어 서비스를 하며 자기 길을 걷는 최희정. 왜 박신혜여야 했을까. 그는 나중에서야 캐스팅 이유가 '바른 이미지' 때문이었다고 전했다.
정의롭고 심지가 굳은 캐릭터와 실제로는 얼마나 닮았을까. 박신혜는 "모든 분들이 그러시겠지만 웬만한 법은 다 지키고 살고 있다"라고 답해 좌중을 폭소케 했다. 다양한 가치관과 스타일을 가진 사람 중 가장 닮은 캐릭터를 묻는 질문에도 그는 희정을 택했다. 돈보다는 다른 가치관을 중시하는 성격이 비슷한 것 같다며.
극중 최희정은 사건의 실마리를 풀고자 노력하지만 종종 함정에 빠진다. 진실을 열렬히 좇았지만 놓친 경험, 박신혜는 있을까.
"살면서 그런 걸 겪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근데 저는 그런 걸 붙잡고 늘어지는 편은 아니고 빨리 훌훌 털고 일어나려는 편이다. 저는 제 눈앞에 펼쳐진 것, 제가 보고 듣는 것 외에 누군가에게 어떤 소식을 듣더라도 잘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제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아니고, 진실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그런 면에서는 희정이랑 비슷한 것 같다. 자기가 직접 보고 믿는 편이니까."
◇ "'침묵'은 시나리오보다 극장에서 더 재밌는 영화"
'침묵' 제작발표회 때 최민식은 배우들을 "매력적인 아우들"이라고 찬사를 보냈고, 이렇게 좋은 배우들과 함께 하면서 '영화'라는 작업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다고 밝혔다. 촬영현장 분위기가 얼마나 좋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배우들과 연기한 소감을 묻는 질문에 박신혜도 "너무 다들 유쾌하고 성격이 워낙 좋아서…"라며 훈훈한 얘기들을 잔뜩 꺼냈다. 우선, 최민식의 카리스마와 기에 눌리면 어떡하나 고민했다던 그는 "그 기를 제가 받아서 연기할 수 있었다. 잘 감싸 안아주셨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류준열은 본인과 고민거리나 관심사가 굉장히 비슷한 사람이었다고. 박신혜는 "현장에 좀 더 즐겁고 재미있게 다가갈 수 있게 긴장을 많이 풀어줬다. (제게) '선배님~' 이러면서 장난도 친다"고 말했다.
이수경을 두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박신혜는 "연기를 진짜 너무 잘하는 것 같다. 평소엔 되게 순둥순둥한데 카메라 앞에만 가면 달라진다"며 "(이하늬와 대립하는 씬을 보고) '수경아, 너 욕 엄청 차지게 잘하던데'라고 장난치면 '언니~ 아니에요~'라고 한다. 진짜 귀엽다"며 엄마미소를 지었다.
박신혜는 '침묵'을 "시나리오도 재밌지만 극장에서 오히려 더 재밌었던" 작품이라고 평했다. 매력적인 '영업 멘트'가 아닐 수 없다. 최종편집을 하며 중간 과정이 바뀌었기 때문이란다.
방향성은 유지하되 사건 나열 순서가 달라졌다. 원래는 동명과 희정이 만나는 씬도 있었다. 박신혜는 "시간 순서가 변하며 사건 실마디들을 꼬았고, 거기서 재미가 좀 더 생겨 저는 오히려 좋았다"고 밝혔다.
(노컷 인터뷰 ② '침묵' 박신혜 "신데렐라 역 안 끌려… 주체적인 역할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