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28일 금융감독원 블라인드 앱에 올라온 글에는 댓글이 41개나 붙었다. 블라인드 앱은 직원들이 회사 내부 문제 등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서비스로, 철저하게 익명성을 보장해준다.
이 글에 금감원 직원들은 "저는 무조건 만점 (줘요) X같아도", "안 주면 전화와요" 라거나 "직원들이 몇 점 줬는지 알아 본다는 말을 들었으니 주죠"라는 댓글을 달았다. "평가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우리 스스로 그런 일을 저지르니 안 되죠",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는 등의 갑론을박도 이어졌다.
◇ 100명 중 75명이 99점 이상 받는 금감원 리더십 평가
이같은 일은 올해도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금감원은 26일부터 일주일 동안 리더십 평가를 실시한다고 공지했다.
팀원이 팀장이나 국·실장 등 상사를 평가하는 상향식 평가 시스템인 '리더십 평가'는 매년 두 번(상·하반기) 실시한다. 근무평가의 10%를 차지하며 인사 참고 자료로 활용돼 피평가자인 팀장, 국·실장들의 관심이 높다.
이 리더십 평가는 금감원 출범 초기부터 조직의 리더를 평가하겠다는 취지로 출발했다. 하지만 익명이 보장되지 않아 팀원들은 거의 만점 가까운 점수를 주고 있는 실정이다.
한 팀에 3명 정도로 이뤄지고 있는 '소팀제'이기 때문에 누가 나쁜 점수를 줬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가능성이 있고, 인사팀 관계자에게 물어봤을 때 자신의 점수가 공개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블라인드에 한 직원은 "저도 작년인가 도저히 점수를 줄 수 없어 90점 아래로 줬더니 재평가 하라고 인사(팀)에서 안내를 하더군요"라며 "울며 겨자 먹기로 100점을 줬어요. 이런 XXXX 같은 기준은 왜 있는 건지, 유치원 수준의 감독원 평가 체계를 보면 실소가 나온다"고 신랄한 비판을 했다.
인사고과를 틀어쥐고 있는 상사가 행여라도 자기가 준 낮은 점수를 알았을 때 승진에 악영향을 줄까봐 울며 겨자 먹기로 만점을 준다는 것이다.
팀장의 경우 상위 25%는 100점을 받았고 하위 25%는 99점을 받았다. 즉 팀장이 100명이라면 25명 이상이 100점, 75명 이상이 99점 이상을 받았다는 말이다. 변별력이 떨어져 유명무실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금감원 관계자는 "리더십 평가가 시작되는 날 인사팀이 이렇게 상반기 평가 자료를 올리는 것은 사실상 '가이드라인'이나 다름 없다"고 지적하며 "지난해 리더십 평가 결과만 놓고 봐도 전교 100명 중 50등이 100점, 75등이 99점인 것과 똑같다. 이런 시험이 어디 있느냐. 코미디나 다름 없는 평가"라고 일갈했다.
금감원 인사팀 관계자는 "평가자가 점수를 줄 때 어느 정도가 평균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참고자료를 올린 것이지 가이드라인은 아니다"라면서 "평가가 쏠리는 것은 알지만 변별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적은 편차이긴 하지만 리더십 평가를 나쁘게 받으신 분들은 큰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금감원 노조는 이처럼 유명무실한 리더십 평가를 개선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외부 용역을 통해 '당나귀 귀'라는 평가 시스템을 개발했다.
당나귀 귀 시스템의 핵심은 익명성 보장 강화다. '비밀의 리더십 평가'를 통해 평가자들의 개별 평가 점수를 도출하지 않고 평균 점수만 볼 수 있게 했고, '비밀의 숲'이라는 카테고리를 통해 내부 고발 제보 시스템을 구축했다.
노조는 사측과의 임단협 안건으로 당나귀 귀 시스템을 수용해달라고 건의했고, 다음 주 종합 국정감사 이후 실시될 임단협에서 이에 대한 여부가 결정난다.
노조 관계자는 "이번에 채용 비리 문제가 불거진 것도 인사고과 때문에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거부할 수 없었던 내부 조직문화에서 비롯됐다는 반성의 목소리가 많다"면서 "이런 문화를 개선하고, 관리자 집단 내의 '악화의 양화 구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