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소한의 공정성' 파괴된 문제에 좌우 구분 없었다
스스로를 '온건 보수'라고 인식하는 30대 직장인 이씨는 지난 탄핵촛불에 가족과 함께 두 차례 참여했다. 이씨는 "거창한 절차적 민주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기준도 지키지 못한 정권에 대한 분노가 가장 앞섰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 같은 보수진영의 참여는 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위원 등이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집회 참가자 258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및 현장면접을 실시한 결과, 참가자의 정치이념도는 진보층이 39.1%, 중도층 19.4%, 보수층 17.3%였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당시 참가자 이념지형이 대부분 반정권 진보세력이었던 것과 대조적인 부분이다. 촛불의 주체가 이른바 '전문 시위꾼'이나 '반대 세력'이 아니라 헌법을 위반한 대통령의 일탈행위에 분노한 '시민'이었다는 의미다.
김창진 성공회대 교수(정치사회학)는 "최소한의 공정함과 합리성이 어처구니 없이 무너진 것에 대해서는 좌우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면서 "이념을 초월한 공분이 있었던 것은 국정농단의 문제 자체가 워낙 심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는 경찰의 대응이 해산이 아닌 충돌 방지 수준에서 유례 없이 협조적일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경찰 관계자는 "굳이 경찰력을 과시하기 전에, 과격한 목소리나 행동은 현장에서 참가자들에게 제지를 당했다"고 말했다.
이같은 특징은 집회의 목적을 그간 집회들처럼 '반(反)정치'가 아닌 '정치'로 이끌었다. 탄핵 소추라는 국회의 행동을 촉구했고, 파면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이끌어낸 것 모두, 제도 안에서 정치적 행위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서복경 연구위원은 "개인인 내가 문제제기를 했더니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정치적 효능감', 내 삶이 정치와 연결됐다는 걸 체감하는 게 이번 촛불집회에서는 가능했다"며 "현실 정치에서는 어려운 일인 만큼 그 효능감도 상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배출한 당시 새누리당이 국회 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것 역시 당시 촛불집회가 예의 '종북좌파' 프레임에서 자유로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적 현상이 정치적 결정까지 이어지도록 하는 동력이 됐다는 의미다.
안진걸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촛불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연인원 2천만 명이 넘는 참가자들"이라면서 "끈질기게 저항한 결과가 결실을 맺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