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선 작가, 이태곤 감독 모두 박은빈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이는 여지를 열어주었다는 게 '신뢰'의 핵심이었다. 배우 스스로 분석하고 상상력을 펼쳐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는 대본, '네가 어떻게 해도 괜찮다'며 독려한 현장 분위기 등은 박은빈이 마음껏 연기할 수 있는 든든한 동력이 됐다.
송지원은 이번 시즌에서 자신의 어두운 과거와 마주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옛 절친의 진실을 좇는 막중한 역할이었다. "지원이가 지금도 벨에포크(극중 하우스메이트들이 함께 모여 사는 셰어하우스)에서 살고 있을 것 같다"는 감상이 가장 기분 좋았다는 박은빈은, 송지원이라는 캐릭터에 시청자들이 더 잘 스며들 수 있도록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야 했다고.
'청춘시대2'의 송지원으로 활약한 배우 박은빈을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사건을 풀어나가는 '개인' 송지원과 하메들과의 '관계' 두 가지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았다.
(노컷 인터뷰 ① 박은빈 "박연선 작가 작품, 분석·상상의 여지 많아 좋다")
일문일답 이어서.
▶ '청춘시대2'에서는 송지원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절친한 친구 문효진이 과거 미술선생님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긴 지원의 개인사가 드러나기도 했다. 관찰자에서 극의 중심으로 오며 더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작은 텐션이 모여 큰 파장이 되어, 마치 해일이 덮쳐오는 것처럼 송지원을 덮쳤지 않나. (* 문효진의 전 남자친구는 문효진이 마지막으로 남긴 분노 가득한 편지의 수신인이 송지원이라는 것을 알고 하메들이 사는 벨에포크로 와 이들을 협박한다.) 여러 감정의 변화가 있을 텐데, 거기에 많이 주의했던 것 같다. 그 전과 다른 송지원의 모습인 건 분명하지만, 그 감정만 따라가기에는 송지원이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원래 힘이 있었지 않나. 유쾌하고 발랄하고 코믹한. 그런 것들을 버리고 가기에는 너무 아깝기도 했고, 완전히 버릴 수도 없었다.
이 친구가 아무리 그런 큰 사건을 겪었다고 해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스물 세 살, 어느 정도 자아가 성숙한 상황에서 그런 사건을 맞았기 때문에 인간이 확 변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감정선을 표현해야 되는 건 제게 주어진 과제였다 보니까, 자칫 잘못하다가 이중인격이나 다중인격으로 보이지 않도록 노력했다. '저 친구는 왜 저렇게 감정이 널뛰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경함을 주기보다는 확실히 달라져서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만 예전의 지원이 모습도 잃어버리지는 않았구나 라는 마음이 들 수 있도록 저 스스로 감정선에 대해서 잘 유지해 나가는 게 필요했다. 동떨어진 사람으로 느끼지 않도록 노력했다. 제가 갖고 있는 느낌을 조금이나마 시청자 분들도 공감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청춘시대' 시리즈의 매력이자 완전히 대중적일 수는 없는 약점 중 하나가, 사람의 감정을 바닥까지 끌어내리거나 도저히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황에 인물을 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즌2에서는 문효진의 전 남친이 하메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씬이 대표적이다. 이런 장면을 찍으면서 심적으로 힘들지는 않았는지.
캐릭터를 연기할 때만큼은 그 캐릭터가 되어서 살아가다 보니까 영향이 없을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런 (폭력 장면이 나오는) 상황일수록 훨씬 더 많은 주의와 노력을 기울여서 안전하게 촬영을 끝내는 게 목표다. 하지만 저희는 연기를 하는 게 직업이다 보니, (힘든 상황을 찍는다는 것에) 너무 연연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뭔가 우리가 모두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효진이 입장에서 지원이는 방관자인 거다. 효진이 입장에서는 한관영 선생님뿐만 아니라 저도 되게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홧김에 분홍 편지를 남긴 것도 지원이가 (자신을) 구원해주기 바랐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목격에 그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자기를 구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지원이 입장에서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 없을 정도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였던 거죠. 숨죽이며 들키지 않기를 바랐던, 아무도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모르길 바라고,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부정하고 싶은 어린아이의 큰 충격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저는 지원이도 피해자라고 봤다. 너무 어릴 때 겪은 상황인 거고, 마주하기도 싫은 선생님과 본다는 것도 트라우마를 가진 지원이에게는 폭력적인 상황이니까. 그 어린 아이가 느꼈을 죄책감은…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포장할 수 있는 건 거짓말밖에 없기에 무의식적으로 부인하고 외면했던 건 아닐까. 그 정도의 큰 고통이라는 게 깊이 아프게 와닿았던 점이었다. 그런 점들을 들 수 있겠다.
저희 드라마가 효진이 시선을 따라온 건 아니지 않나. 제 시선을 따라온 것도 아니었고. 생략돼 있던 효진이의 감정이라든지, 왜 그런 편지를 썼을지, 가해자는 한관영 선생님인데 왜 처음에는 분노의 방향이 지원이에게 튀었을까 그런 (빈) 공간들을 제가 많이 생각했다. 분노는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효진이가) 지원이를 본 순간 분노의 화살이 지원이에게 튀었다고 결론 내렸다.
▶ 효진이 지원에게 쓴 편지가 발견된 책은 '지연된 정의'였다.
저희 드라마 부제가 '부치지 않은 편지'였다. 효진이도 '지원이 또한 나와 같은 피해자구나'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은회를 같이 가기 위해 지원이 이름을 썼지 않았을까. 그런 심정들이 되게 마음 아프게 다가오더라. 제가 사은회 장면 때에도 문효진 이름 쓰고 초대장을 함께 가져갔듯이. 저는 효진이와 (그 자리에) 같이 왔다고 생각했고, (사건이 일어난) 그날에 했어야 했던 진실의 목소리를 밝히려고 했다. 비록 효진이는 없지만. 겁나고 무서워서 외면하고 싶었던, 13년 전에는 이루지 못했던 진실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래서 '지연되었던 정의'를 다시 찾아나서는 것, 그게 지원이가 새롭게 원하는 바이자 걷고 싶었던 길인 것 같다.
저는 ('지연된 정의'라는) 책을 실제로 읽진 않았지만 그 제목만 보자면, 지원이가 왜 기자의 꿈을 꾸게 됐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정의롭지 못했다는 죄책감… 원래 지원이는 (초등학생 시절에) 소심하고 말수도 없고 친구 사귀기에도 어려움이 있다고 (통지표에) 적혀 있었다. 그런 지원이에게 효진이는 내 옆에 있었던 가장 친한 친구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참 그 둘의 사연이 마음 아팠다. 13회 엔딩 내레이션에 "기억하는 것도, 기억하지 않는 것도 할 수 없었던 나의 친구 문효진"이라는 말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거기에 오직 진실에 복종하겠다는 문구가 써져 있다. 지원이는 진실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진실을 전하는 기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무의식적으로 품지 않았을까 싶다. 기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지만 사실 평소 송지원은 거짓말을 일삼는 아이잖아요. 다가설 수 없는 진실과 멀어지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는데, 장래희망은 기자다? 이 아이는 도대체 어떤 진실을 말하고 싶어 하는 걸까 모순적이라고 봤다. 언행과 꿈이 N극과 N극(상극) 같은 느낌이었으니.
그러다 그 소동의 날을 겪고 나서, 지원이는 자기가 믿고 싶었던 가치와 정의로부터 배신당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때 부제가 '나는 나를 배신했다 #추락'이었다. 자기는 그런 (자기가 생각하는 류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 확 와닿는. 그날 지원이는 한 번 죽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기자라는 직업을 가치있게 여겼고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나는 누군가를 자살에 이르게 했다', 그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정황상 내 거짓말로 인해 나는 누군가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럴 가치(기자가 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절망했겠죠. 한때 보물, 자랑이라고 여겼던 대학언론인상이 하등 쓸모없는, 나를 기만한 트로피가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차없이 버리고, 기자 꿈도 접고. 자기파괴적인 행동이라고 본다. 어찌됐든 (나중엔) 기억을 다시 찾았고, 자기가 생각한 게 진실이 아니었다는 것도 완전히 알았으니까 아마 그 이후에는 문효진 사건을 계기로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진정한 기자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까. 트로피 같은 건 그냥 물체에 지나지 않는 거잖아요? 글을 통해서 얻은 정신이 중요한 것이니까요. 그래도 윤선배가 (트로피를) 발견했으니 (집안) 어디엔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 '청춘시대'는 5명의 하메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만들어지는 관계성도 큰 재미 중 하나였다. 시즌1부터 2까지 진명, 이나, 예은, 은재, 은과 지원은 각각 어떤 사이였다고 생각하는지.
윤선배(한예리 분)부터 얘기하자면, 새로 들어온 은재한테 윤선배 일상을 낱낱이 막힘 없이 얘기해줄 수 있을 정도로 지원이는 주변 사람들한테 관심을 많이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도 연애하고 있기 때문에) 은재의 연애 이야기를 관심 갖고 쳐다 본 윤선배를 보면서 의아하다고 생각하고, 윤선배의 달라진 지점을 누구보다 눈치 빠르게 캐치했다. 윤선배가 손톱 빠졌다고 울고 있을 때에도 위로하고 안아줄 수 있었던, 벨에포크의 수호천사 같은 존재가 지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선배 또한 시즌2에서 지원이가 놀이터에서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지원이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지 않나. 그래서 힐링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할 정도로 지원이의 다른 점을 짚어내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선배였던 것 같다. 둘은 알게 모르게 의지를 많이 하는 존재이지 싶었다.
예은이(한승연 분)는 룸메이트잖아요. "쏭, 자?" "안 자~' 자주 이러고. 잠결에도 계속 대화를 나눌 정도로 둘은 거의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을 것 같다. 취향이 아예 달라서 부딪치는 부분 없이 더 풍부하게 얘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호흡도 좋았다. 촬영 장면 보면서 승연언니가 "어떻게 너랑 나는 리액션까지 저렇게 똑같이 할 수 있냐? 눈 굴리는 것까지…"라고 했고, 그러면서 많이 웃었다.
저는 은재(지우 분) 은재의 아픔이랄까 어둠을 알아채고 밝은 기운을 주는 사람인 것 같다. 은재가 처음에는 저를 선망하고 존경하는 선배로 여기지만 (은재란) 사람도 변했고 시간도 지났다 보니까 제게 못하는 말이 없어졌잖아요? 편한 언니로 생각했기 때문에 무시도 할 수 있다고 봐요. 진짜 무서운 사람에겐 못하니까. 또 마음이 여리고 연민이 많은 친구다 보니까, 제가 운동장에서 없어졌을 때도 정말 걱정했잖아요. 타인의 상처에 대해 누구보다 공감하고, 제 걱정도 많이 하는 친구여서 은재와의 관계도 되게 끈끈한 것 같다.
은이(최아라 분)를 보고는 제 뻔한 레퍼토리(농담)가 먹히지 않아 놀랐을 것 같다. 지문에도 '영혼이 탈탈 털린 기분'이라고 나와 있었다. 이런 애는 어디서 나타난 거지? 왜 내 농담에 웃지 않고 반응 안하지? 그런 점에서 멘붕을 가져다 준 친구지만 여리고 귀여운 구석도 많다. 그걸 지원이가 놓쳤을 리 없었을 것 같다. 그러니 (다같이) 목욕탕도 갔다오면서 하메들끼리 서사가 쌓인 것 같다. 은이가 저를 처음에는 거짓말 많이 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을지 몰라도, 지원이는 누군가를 배척하는 스타일이 아니고 따뜻하니까 (은이와) 하메들이 가까워질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은이도 유대감이 쌓여서 효진이 전 남친이 찾아온 무서운 상황에서도 정말 송지원이 문 밖을 나가면 죽을 것 같으니까 막아설 수 있을 정도의 용기가 생긴 게 아닐까.
이나(류화영 분)는… 송지원은 강언니의 삶을 부러워했다. 남자를 많이 만나면서도 연연하지 않고! 아주 송지원의 (웃음) 롤모델 같은 느낌? 송지원의 털털함과는 좀 다르지만 이나도 털털한 면이 많이 보이는 친구였다. 그래서 쿵짝이 잘 맞았다. 남자들을 많이 데려오자! 둘이 신나서 술 사러 가고 이러기도 하고. 똑같이 유쾌하고 통쾌한 면이 있지만 약간 뉘앙스가 다른 털털함이 있어서, 서로 만났을 때 더 시너지가 나는 것 같았다. 둘은 되게 뒤끝 없는 관계랄까. 재밌었어요.
▶ 이번 작품을 통해 새롭게 만들거나, 굳히게 된 목표가 있을까.
예전에 되게 거장인 한 선배님께서 "연기는 결국 자기만족이다. 자기가 행복할 수 있어야지. 남의 평가에 좌지우지될 필요 없다"고 조언해 주신 적이 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아, 내가 만족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확 들었던 것 같다. 전 연기를 할 때 전 제 스스로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송지원 캐릭터가 어딘가에 지금도 벨에포크에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해 주신 걸 듣고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제가 앞으로 연기를 하면서도 진짜 그런 캐릭터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청자들이 보셨을 때 극 몰입에 방해되지 않게 그 캐릭터를 잘 연기해 냈으면 좋겠다. 100% 만족은 있을 수 없겠지만, 제가 만족하면서 연기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