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치권에서 불거진 '적폐청산=정치보복' 논란을 접하고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해방 후 독재의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다면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과거에 잘못이 있었다면 뭉그적거리며 넘어갈 것이 아니라 바로잡는 것 아닐까요? 문재인 대통령이 추진 중인 적폐청산이 일부 보수야권의 주장처럼 정치보복이 아니라 '역사 바로 세우기'로 해석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국정농단과 블랙리스트 등 적폐청산의 대상인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은 자신들이 마치 정치보복의 희생양인 양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16일 공판에서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은 저에게서 마침표 찍어졌으면 한다"고 밝혔고, 그의 변호인단은 법원의 추가 구속영장 발부에 반발하며 전원 사퇴했습니다. 또한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안보가 엄중하고 민생 경제가 어려워 살기 힘든 시기에 전전 정부를 둘러싸고 적폐청산이라는 미명 하에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며 "이러한 퇴행적 시도는 국익을 해칠 뿐 아니라 결국 성공하지도 못한다"고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바로 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더불어민주당 적폐청산위원회 간사인 김병기 의원은 지난 8월 첫 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금년 촛불혁명이 있기 전까지 4·19혁명과 서울의 봄, 6·10항쟁 등 적폐청산의 세 가지 기회를 흘려보냈다. 동일한 죄를 반복하게 만든 우리도 반성해야 한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라고 말이죠.
김 의원의 말마따나 우리 역사의 중요 변곡점마다 적폐는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습니다. 친일파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산 환수, 5·18 진상 규명 등의 문제가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혁명의 열기가 무르익었을 때 책임자 단죄가 적절히 이뤄졌더라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 다르게 전개되지 않았을까요?
"국내 모든 적폐를 과감하게 일소하고 앞으로 있을 총선거에서는 공정하고 자유스러운 국민의 의사표시로서 유종의 미를 거두어…."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월혁명 이후 장면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은 6·25 10주년 기념사에서 '적폐 일소'를 강조했습니다. 3·15 부정선거 연루자를 비롯한 이승만 독재정권 부역자를 단죄하고 공정한 세상을 열어야 한다는 포부였죠. 과연 적폐는 단번에 일소되었을까요?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성명을 발표한 이후 장면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100여일 동안 정국을 관리한 것은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이었습니다. 4·19혁명 직후 이승만에 의해 외무장관으로 발탁된 인물이죠. 내각제로 개헌을 하고 총선을 통해 새 정부를 출범시키는 것이 과도정부의 목표였기 때문에 이승만 부역자 처단 등 시민사회의 요구는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아일보는 60년 5월 20일자 사설에서 과도정부의 이같은 특성을 명확하게 지적했습니다. "현 임시정부는 본질적으로 구 정권의 연장이요 따라서 혁명세력을 대표할 만한 하등의 정신적 기초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설은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부정부패한 자를 철저히 색출해 처벌해야 함에도 검찰 수사마저 미흡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혁명완수를 위한 특별처벌입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과도정부는 특성상 한계가 있다고 치죠. 그런데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언론의 논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경향신문 60년 10월 1일자 기사는 장면 국무총리의 시정방침을 전하면서 혁명정신을 이행하라고 촉구했는데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선거원흉 처단 문제만 보더라도 국민의 물 끓듯한 여론이 특별법 제정을 그다지도 촉구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끝끝내는 구 질서 하에서 다루겠다고 하다가 결국에는 속출하는 면소 판결을 보고서야 당황하지 않았던가? 부정축재자 처벌 문제도 같은 사고방식으로 인해 끝끝내는 혁명정신 그 자체를 무색하게 만들고야 말지 않았는가."
민주당 정권 역시 혁명입법 추진을 미루적거리는 등 적폐청산에 소극적으로 임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민주당 내부에서 신구파 간 파벌 싸움이 계속되면서 민심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는데요, 이같은 민주당의 실정은 결과적으로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초래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그래서 이승만 부역자들은 어떻게 됐냐고요? 부정선거 사범은 극히 일부만 재판에 넘겨졌고, 그마저도 면소 판결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부정선거 사범 두 명은 옥중 출마해 당선되기까지 했습니다. 부정축재자들의 재산 몰수 역시 무위로 끝났죠.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살해된 1979년 10·26 이후부터 1980년 전두환의 5·17 쿠데타 이전까지를 '서울의 봄'이라고 합니다. 민주화 요구가 봇물처럼 터진 시기였죠. 유신체제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이에 79년 11월 함석헌·백기완 선생 등 재야인사와 운동권 학생들이 결혼식을 위장해 YWCA에 모였습니다. 이들은 박정희 때처럼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제를 통해 대통령을 뽑아서는 안 되고 직선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유신 철폐를 외쳤다가 계엄군에 의해 강제 연행됐습니다.
같은 해 12월 6일 최규하 대통령이 간선제로 선출됐지만, 10·26 이후 권력의 중추에 섰던 신군부가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면서 실권을 잡았습니다. 유신의 잔재를 청산할 새도 없이 시민사회는 새로운 독재 권력과 맞닥뜨려야만 했죠. 서울의 봄은 80년 2월 김대중이 복권된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는데요, 학생운동 진영을 중심으로 계엄령 해제, 유신잔당 퇴진, 민주세력 참여 없는 개헌 논의 중단 등을 요구했습니다.
같은 시기 김영삼과 김대중은 김대중의 신민당 복귀 문제 등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실상은 대권 싸움이었죠. 당시 야당이 분열하지 않고 시민사회 세력과 힘을 합쳤더라면 한국의 민주화는 좀 더 앞당겨졌을지도 모릅니다. 사회적 혼란을 틈타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다음날 광주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벌어지면서 서울의 봄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말 그대로 '빼앗긴 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신잔당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80년 2월 2일자 경향신문에는 "구 집권당인 공화당이 18년에 걸친 정부와의 밀월관계를 청산하고 집권당 위치에서 하루아침에 원내 다수당으로 떨어져 (중략) 창당 주역인 김종필 총재를 롤백시켜 집권 태세를 다시 가다듬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유신정우회 출신 상당수 의원들은 공화당 입당을 엿보면서 계속 정치권에 남아있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대목도 나오죠. 81년 10월 5일자 동아일보에는 민한당 유치송 총재가 "유신체제의 잔재를 철저히 청산하는 일이 최우선으로 수행해야 할 과업"이라고 주장하는 기사가 실렸는데요, 독재자 박정희가 사라진 지 2년이 다 되도록 유신 청산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방증입니다.
81년 10월 당시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이낙연 국무총리는 통대(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출신 의원들이 친목회를 결성하자 칼럼을 통해 이를 비판했습니다. "통대 출신 의원들은 좀 더 극기했으면 한다. 적어도 국민의 인상 앞에서 이들은 일말의 정신적 부채감을 가져야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칼럼은 적폐청산의 대상이었던 유신잔당 세력들이 죄의식 없이 얼마나 기고만장했는지를 보여줍니다.
1987년 전두환과 노태우 등 신군부가 6월 민주항쟁에 굴복해 6·29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한 뒤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겠다는 내용이 골자였죠. 그리고 10월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개헌안이 통과됐습니다. 대통령을 5년 단임으로 선출한다는 내용이 핵심인데요, 독재자 박정희 시절에 비하면야 대통령 권한이 많이 축소됐지만 여전히 대통령은 제왕과 같은 존재였죠. 같은 해 12월 드디어 16년 만에 역사적인 대통령 직접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신군부는 과연 국민의 심판을 받았을까요? 아시는 바와 같이 적폐청산의 대상이 다시 권력을 잡는 아이러니한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김영삼과 김대중 양김이 또다시 분열했기 때문이죠. 김영삼은 통일민주당 후보로, 김대중은 평화민주당 후보로 각각 대선에 출마했습니다. 덕분에 민정당 후보로 출마한 노태우가 36.6%라는 낮은 득표율에도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신군부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았으니 6월 민주항쟁 주역들의 심정이 얼마나 허망했겠습니까. 불행 중 다행으로 대선 이듬해 치러진 총선에서 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출현하면서 국회 내에 '5공비리 특별위원회'가 설치됐습니다. 아울러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도 생겨났죠. 이에 전두환은 같은 해 11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백담사에서 칩거했습니다.
하지만 사법처리 문제는 노태우 정권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국회 청문회를 거쳐 검찰에 5공비리 특별수사부가 설치됐지만, 비리 총책인 전두환은 쏙 빠지고 전두환의 최측근인 장세동,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 등 47명만이 구속기소됐습니다. 그마저도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려났거나 정치적으로 사면됐습니다. 한겨레는 89년 12월 30일자 기사를 통해 "일정한 선을 그어놓고 그 안에서 시늉만 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동아일보도 91년 6월 25일자 '어물쩍 다 풀려난 5공비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재야 법조인을 인용해 "5공비리라는 한 시대의 잘못을 사법부와 검찰이 추상같은 자세로 심판하지 못했다"고 꼬집었습니다.
1993년 김영삼이 정권을 잡은 이후 12·12 사태를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로 규정하면서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김영삼은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는 뜻을 거듭 표명했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잘못은 했지만 그렇다고 사법처리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메시지를 검찰 측에 꾸준히 던진 것이었죠. 결국 검찰은 전두환과 노태우 등 58명에 대해 공소권이 없다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습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유명한 어록이 이때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95년 노태우 비자금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수사 요구가 빗발쳤고, 12·12 쿠데타와 5·18의 공소시효를 정지하는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다시 시작됐습니다.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징역 17년이 최종 확정됐지만, 김영삼이 대선 직후 이들을 특별사면하면서 구속 2년여 만에 출소하게 됐습니다.
※참고자료
서중석,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20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