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9 비자엔 '기업 프렌들리'의 그림자…사업장의 '부르심' 기다릴 수밖에
수시라후얄 씨처럼 'E9', 비전문취업비자를 가진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은 '직접 나서서' 직업소개소나 지인 등을 통해 따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 고용노동부 지침상 E9 비자 노동자들은 고용노동부 산하 고용센터를 통해서만 일자리를 알선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알선' 정보는 구직자에게 폐쇄적이다. 고용노동부는 학력, 나이 등의 정보가 담긴 구직자들의 명부를 구인자, 즉 사업장에 넘긴다. 반면 구직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제 올지 모르는 사업장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수시라후얄 씨는 "돈이 없어서 계속 기다리고만 있기가 힘들어 고용노동부에 찾아가기도 했는데 '좀 기다리세요'란 소리만 들었다"고 호소했다.
지난 25일 동안 세 차례 알선을 받긴 했지만, 내용은 형편 없었다. 분명 여성인 자신에게 알선된 사업장에 전화를 했으나 "남자가 필요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하루를 꼬박 투자해서 멀리까지 찾아간 일터였지만, '하루 11시간 노동에 한 달 2일 휴무'란 조건을 듣고 고민 끝에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리기도 했다.
상추농장에서 일하다가 허리 통증에 일을 그만둔 다망런자나(26) 씨 역시 언제쯤 알선이 올까 하루 종일 전화를 붙들고 있는 상태다. 그는 "밤에도 잠을 못 자고 어떻게 빨리 일을 찾나 생각만 한다"고 말했다. 다망런자나 씨의 경우 주어진 구직기간이 한 달여 밖에 남지 않아 불안한 마음이 더 크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는 "자국에서 한국어시험을 보고 온 이주노동자라도, 한국어를 잘 모르다보니 종종 브로커가 개입돼 피해를 보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현행 제도가 일자리를 옮기는 이주노동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설명이지만, 실제로는 이들을 고용하는 사업장에게만 유리한 제도라는 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고용센터의 알선과 함께 구직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설정되는 '알선유효기간' 3일이 대표적이다. 사업장에서 알선을 중단하지 않는 이상, 구직자는 이 3일 동안 다른 사업장을 소개받을 수 없다. 사업장에게 주어지는 독점적 협상권인 셈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가 "3개월이면 그래도 몇 개 사업장을 소개받을 수 있다"고 얘기할 때 이주노동자들이 하루 종일 휴대전화 곁을 떠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이유다.
용인이주노동자쉼터의 고기복 대표는 "구직자들에게 불리한 이런 정책들은 실질적으로 당시 이명박 정부의 '비즈니스프렌들리' 기조에서 나온 것"이라며 "고용주 우선의 정책이자 행정편의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 외국인등록도 안 해주고 해고…오늘도 "일하고 싶다"
캄보디아에서 온 비엔(37) 씨와 나리(41) 씨의 경우 경기 광주시의 농장에서 한 달여 일했지만 외국인등록증을 채 만들기도 전에 해고됐다. 한국의 고용주는 캄보디아 당국으로부터 받은 외국인등록 관련 서류를 돌려주지도 않았다. 아무리 합법적으로 비자를 발급받아 온 노동자여도 외국인등록증이 없으면 거부감을 느끼고 계약을 맺으려 하지 않는 사업장이 흔하다.
정부는 이 와중에 외국인등록증을 만들기 전 사전예약 절차까지 만들었다. 체류 외국인이 밀집된 사무소에서 장시간 대기에 따른 민원이 제기됐다는 게 이유였지만, 이주노동자들에겐 복잡한 절차인 만큼 따로 행정사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일을 맡기는 게 현실이다.
새로운 일을 구하고 있는 네팔인 라이(24) 씨는 "하루 8시간 일하기로 계약 했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일을 시키고 돈은 그 만큼 안 줬었다"면서 "공부하고 있는 동생을 비롯해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빨리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