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되면 돌아올게요" 지키지 못한 70년 전 약속

1세대 실향민 진경선 씨 "추석만 되면 고향 생각에 피눈물 흘러"

1세대 실향민 진경성 할아버지(92) (사진=정석호 기자)
온 가족이 모여 웃음꽃을 피워야 할 추석이지만 이맘때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 몇 년간 남북 관계가 경색된 상황이 답답하기만 한 실향민 1세대는 흐릿해지는 기억만 붙들고 있다.

◇ 생사조차 모르는 이북 가족…"이젠 동생 얼굴도 기억이 안 나"

"월남하면서 어머님께 통일되면 다시 찾아뵙겠다고 약속했는데 이젠 그 약속을 지키기 힘들 것 같아요"

올해 92살로 1세대 실향민인 진경선 할아버지는 6·25전쟁이 터지기 전인 1949년 20살의 나이로 평양 인근의 신양리에서 월남해 이산가족이 됐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몰래 라디오로 남쪽 방송을 듣곤 했는데 이 사실이 당국에 발각돼 야밤에 월남을 감행한 것.

급하게 도주하느라 출장 간 아버지께 인사조차 드리지 못한 진 할아버지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금조각만 들고 남쪽으로 향했다.

진 할아버지는 "급하게 작별인사를 나눈 게 마지막 기억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게 평생 한으로 남는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특히나 추석과 같은 명절이 되면 그리움이 사무친다는 진 할아버지는 매년 이맘때쯤 북에서의 기억을 되새김질한다.


당시 5남매를 포함한 온 가족이 모여 어머니가 해 주신 동치미 냉면을 먹었는데 그 맛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는 게 진 할아버지의 설명이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

진 할아버지는 "이북에서 마지막으로 가족을 봤을 때 막둥이 남동생이 국민학교 2학년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얼굴이 가물가물하다"며 "이러다가 나중에 다시 만나서 알아보지 못할까 초조하다"고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추석에도 진 할아버지는 이북이 보이는 임진각을 방문하는 것으로 부모님 성묘를 대신했다.

◇ 정부 "이산가족 상봉 어려울 듯"

2015년에 열린 제20회차 이산가족상봉행사 (사진=사진공동취재단/자료사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산가족 상봉을 비롯해 북측과 대화의 물꼬가 트일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졌지만 상황은 점점 꼬여만 가고 있다.

북의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 거듭되는 도발로 남북 관계가 경색돼 실향민 입장에서는 애가 타는 상황이다.

진 할아버지는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통일 정책을 내놓는데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이 오락가락하기만 한다"며 "이번 정부에도 많은 기대를 걸었지만 오히려 남북관계가 전쟁 직전으로 치닫는 것 같아 초조하기만 하다"고 걱정을 전했다.

2015년을 마지막으로 재개되지 않고 있는 이산가족상봉은 올해도 힘들 전망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최근 잇따른 북의 도발 등의 상황을 고려할 때 정부 정책에 대해 북이 응답하지 않아 (이산가족 상봉에) 진전이 어려운 상황이다"고 밝혔다.

현재 통일부에 등록된 이산가족은 13만여명이고 이중 생존자는 6만여명으로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상황이다.

진 할아버지는 "그저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성묘를 드리는 게 그저 평생의 소원인데 생전에 통일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며 고개를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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