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한 골프장. 86만216㎡(약26만평) 크기의 골프장 한 가운데 독립운동가 김승학(1881-1964) 선생의 묘소가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다. 후손들이나 참배객들이 한 번이라도 묘소를 찾기 위해서는 어디서 날아 올지 모를 골프공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정도다.
김 선생은 해방 뒤 제대로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한탄하며 독립 투쟁사인 ''한국독립사''를 남겨, 당시 반민특위 활동과 현재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지난 2001년에는 7월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등이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김 선생은 작고하기 전 유언을 통해 친일파들이 국립묘지에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며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했고 후손들은 그 유지를 받들어 당시 국가보훈처 소유의 땅이던 고양시 서삼릉에 묘지를 만들게 됐다. 그러나 70년대 서삼릉 일대에 골프장과 종마장 등이 들어서면서 선생의 묘지는 골프장 한가운데 둘러싸이게 된 것.
김승학 선생의 손자 김병기씨는 "아무쪼록 할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조그만 땅이라도 얻어 이전할 수 있었으면 하지만 여의치 않아 안타깝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시민사회단체도 지역과 연계에 김 선생의 묘지 이전을 추진하고 있지만 어려운 실정이다.
김 선생의 묘지 부지가 현재 기획재정부 땅에 귀속돼 있지만 기획재정부는 관할 자치단체에 확인하라는 답을 하고 관할 고양시는 연락을 주겠다는 말만 남기고 더 이상의 답변이 없는 상태.
독립운동가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국가보훈처는 "대전에 있는 국립현충원이라면 이전을 알아봐 줄 수 있다"고 말을 하고는 있지만 김 선생의 유지를 받들고 싶은 유가족들과 시민사회단체의 바람과는 상충되는 부분이다.
김 선생의 묘지 이전을 추진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고양지부 이철민 지부장은 "쉽사리 일반인들이 발걸음을 하기 힘든 골프장에 묘지가 있는데다 푯말도 없어 누구도 오기 힘든 실정이다"며 "관계 기관들이 떠넘기기만 하지 말고 묘지 이전에 힘을 써줘 지역 교육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교육장소가 만들어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 2천900 순국선열들, 도심 속에서 잊혀져
도심 한 가운데 있지만 그 누구도 찾지 않고 있는 순국선열들의 위패봉안소도 있다.
독립관에는 1984년부터 해방 이전 항일 투쟁 중에 사형, 전사 등 숨을 거둔 순국선열 2천895명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그러나 순국선열 위패 봉안소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주변에서 찾을 수 없다.
위패 봉안소를 관리하고 있는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의 상주 인력은 1명. 위패 봉안소를 열어 놓으면 노숙인의 잠자리가 되는데다 인력 부족으로 관리가 어렵다며 3년 전부터는 매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제외하고는 봉안소 문 자체를 아예 잠가버렸다.
1년에 3번 정도 대청소를 하기는 하지만 목조 건물이라 벌레가 먹어 위패 봉안소 안 여기저기에는 나무 부스러기가 나뒹굴고 있고 화재 위험도 늘 상존하고 있다.
순국선열유족회 이흥종 회장은 "구청 측에 공익근무요원 2명만 보내줘도 문을 열어 놓겠다고 하는데 보내주지 않고 있다"며 "서울시와 서대문 구청에서 서대문 독립공원을 재조성한다고 하지만 순국선열 위패 봉안소는 계획 안에 포함되지도 않고 있는 것이 참 한스럽다"고 밝혔다.
순국선열유족회에 상주하며 근무하고 있는 이규전 실장은 "인근 서대문 역사관에 학생들이 많이 오는데 그 곳과 연계돼 아이들이 순국선열들에게 분향을 하고 설명도 들을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됐으면 하지만 인력과 예산의 문제로 어려움이 많다"고 전했다.
실제로 서울시와 서대문 구청은 모두 234억원을 들여 독립문 주변에 1만㎡ 크기의 광장을 만들고 일본식 연못을 한국 전통 양식의 연못으로 바꾸는 등 서대문 독립 공원 재조성 공사를 지난 13일 착공했지만 서대문 독립 공원 내에 순국선열 위패 봉안소와는 별개로 이뤄지고 있다.
독립공원 재조성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시 관계자는 "이번 사업은 ''조성''과 관련된 일이라며 서대문 독립공원의 총 운영을 맡고 있는 남산관리사업소와 봉안소 운영을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 순국선열 ''조선의용대 이원대 선생''의 아들 이동철씨 "러시아에도 순국선열을 위한 영원의 불꽃이 타오르는데..."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에 대해 묵념은 늘 하면서도 순국선열을 가까이에서도 기억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항일 전쟁에 직접 총을 들고 참여한 조선의용군으로 활약하다 일본군에 체포돼 1943년 6월 17일 순국한 독립운동가 이원대 선생.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자손들이 그랬듯 이 씨 또한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 아버지의 일대기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이 씨는 지난 98년 6월 아버지가 이달의 독립 운동가로 선정이 되고 나서야 아버지에 대한 자료들을 하나씩 하나씩 챙겨보고 그 독립운동의 행적들을 쫓게 됐다.
''소화 18년 (1943년) 6월 17일 오전 5시 중화민국 북경 내 1구 동창호동 1호에서 사망''
이원대 선생이 순국한 동창호동 일본 헌병대 감옥에서는 이육사 선생도 숨을 거뒀다. 서울의 명동이라 할 만한 베이징의 왕푸징 인근에 위치한 동창호동이지만 어떤 푯말도 없어 그 누구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씨는 "그 동안 조선의용대가 좌파계열이라고 해서 조명이 잘 되지 못했지만 앞으로 스스로 나서 항일 독립군 자료를 추적하려고 한다"며 "앞으로 더 적극적인 연구가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씨는 이어 "순국선열들의 경우 이념과 상관없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다 돌아가신 분들인데 우리의 경우 서대문 독립공원에 있는 위패들도 방치되고 있는 등 안타까운 점이 많다"며 "전국적으로 추모시설이 만들어져 민족정기를 드높일 수 있었으면 한다"고 바랐다.
이 씨는 순국선열에 대한 존경과 존중이 결국 나라의 위기를 이겨가는 큰 힘이 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