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문제는 병원 측이 관련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유출된 서류를 회수조차 하지않는 등 심각한 의료정보 유출 사건에 대해 손을 놓고 있다는 점이다.
◇ 타 환자 의료기록 동봉해 전달
지난 1일 최근 부정출혈로 한 대학병원 산부인과를 찾은 A(41) 씨는 어처구니없는 경험을 했다.
접수 과정에서 "심장 검사는 왜 받았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는 최근 심장과 관련해 그 어떤 검사도 받은 적이 없었다.
이에 해당 대학병원 관계자는 다시금 서류를 살펴보다 A 씨에게 "타인의 검사 결과를 가져왔다"며 의료법에 저촉되는 상황임을 알렸다.
A 씨는 황당할 뿐이었다. 해당 진료의뢰서와 검사결과지는 A 씨가 그로부터 3일 전인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강남차병원에서 발급받은 것을 봉투 채 들고 온 것이었다. A 씨는 차병원을 다니다가 상급병원인 해당 대학병원으로 옮기려던 상황이었다.
엉뚱한 검사기록지의 주인은 차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또 다른 여성 B(32) 씨였다. A 씨가 차병원에서 받은 서류봉투엔 B 씨가 지난해 1월 받은 검사의 내용과 결과가 구체적으로 담긴 2장의 검사기록지가 함께 동봉돼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병원 측의 후속조치였다. A 씨는 바로 당일 차병원에 전화해 "타인의 검사기록을 발급받았다"고 알렸지만 병원 관계자는 "죄송하다"는 말뿐이었다.
해당 결과지를 회수하겠다는 등 잘못 새나간 개인 정보에 대한 대책은 없었다. A 씨는 "서류를 가져다 달라든지, 가지러 오겠다든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며 "제가 혹시 서류를 복사하진 않았는지, 사진을 찍어둔 건 아닌지 묻거나 주의를 시키지도 않더라"고 설명했다.
이어 "제 정보가 이런 식으로 유출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남의 일이라고 그냥 넘어가기엔 차병원의 대응이 너무 안일하게 느껴졌다"며 "지금껏 강남차병원에서 받은 제 모든 검사지를 회수해 없애고 싶은 마음"이라고 호소했다.
◇"원인 분석한다"며 후속 조치 손 놓은 차병원
차병원은 환자 개인의 정보가 더 이상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CBS노컷뉴스의 취재가 시작되자 '의료계 상황이 워낙 복잡하다보니' 원인을 파악하는 데만 최소 1주일 정도는 걸리며 그 이후에야 관련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심지어 병원 측은 회수 조치 등을 취하지 않은 데 대해 "그렇게 연락을 드리는 걸 불쾌해하는 환자분들이 있을 수 있어 조심스럽다"는 다소 황당한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또 "악용될 만한 개인정보가 들어가 있진 않다고 봤다"며 큰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답변을 늘어놨다.
특히, 유출 피해 당사자인 B 씨에게 관련 사실을 통보조차 하지 않고 있다. 병원 측은 이 또한 '원인 분석 후'로 미뤄둘 뿐이었다. 결국 피해자는 자신의 의료정보가 외부로 유출됐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다른 한편으로 차병원이 '원인 파악'에만 전력을 쏟고 있는 동안 또 다른 피해자가 된 A 씨는 해당 서류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구르고 있다.
◇ "의료기관 신뢰 문제, 강력한 행정조치 필요"
의료소비자연대 관계자는 "병원이 문제의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병원에서 해당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않은 채 '선례'가 될 수 있는 이 상황을 관리하지 않는 것은 결국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란 것이다.
이 관계자는 "보건복지부나 관할 보건소 등 행정기관에서 강력한 행정적 조치를 취할 필요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의료법 제19조는 '정보 누설 금지'를 적시하고 있다. 의료인이나 의료기관 종사자는 각종 의료 업무 관련 정보를 누설하거나 발표하지 못한다. 이를 어길 시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의료법 관련 소송 전문가인 신현호 변호사는 의료 정보 누설에 대해 무거운 형사적 책임을 매기는 이유로 두 가지를 지적한다. '환자의 사생활 보호'와 '의료집단에 대한 신뢰'다.
의료집단에 대한 신뢰는 공공성과도 직결된다. 신 변호사는 "의사에게 나의 아픔을 얘기해도 이 사실이 누설되지 않는다는 신뢰가 있어야 질병에 대한 적절한 치료가 이뤄져 이로 인한 사회적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