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월드컵경기장은 한국 축구의 성지다. 하지만 잔디 상태는 엉망이다. 한국 축구의 성지가 오히려 한국 축구를 울리고 있다.
지난 3월 시리아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7차전이 끝난 뒤 주장 기성용(스완지시티)이 잔디 이야기를 꺼냈다. 기성용은 "대표팀 경기장으로서는 전혀 경기할 수 없는 경기장"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손흥민(토트넘),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 등도 잔디 상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대한축구협회는 8월31일 이란과 A조 9차전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당초 이란전 지방 개최도 고려했다. 하지만 주 훈련 장소인 파주NFC에서 이동하기에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최적의 장소였다. 게다가 이란전 후 9월5일 우즈베키스탄 원정을 치러야 하기에 이동 시간을 단축해 선수들의 피로도를 줄이겠다는 복안이었다.
서울시도 움직였다. 8월19일 K리그 클래식 서울-울산전 이후 일체 대관을 하지 않고, 잔디 보수에 들어갔다. 약 7000만원을 투자해 잔디를 교체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잔디가 제대로 안착할 시간이 부족했다. 신태용 감독도 경기 이틀 전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찾은 뒤 "잔디에 나름 열심히 신경을 쓴 것 같다"면서도 "보식을 한 것이 경기날 제대로 안착이 될지 모르겠다. 지금은 조금 드러나있는데 어느 정도 안착되느냐가 관건이다. 축구화에 힘을 줬을 때 드러날 것 같다"고 우려했다.
덕분에 손흥민과 권창훈(디종), 이재성(전북) 등 개인기가 좋은 선수들의 움직임이 막혔다. 드리블로 수비를 제치려고 해도 잔디가 버텨주지 못해 미끄러졌다. 잔디가 심하게 파여 공이 튀어오르기도 했다.
손흥민은 "핑계로 들릴 수 있겠지만, 잔디 상태가 좋지 않았다. 마음대로 드리블을 할 수 없었다"면서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잔디 상태에 화가 난다. 매번 이런 잔디에서 좋은 결과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희찬(잘츠부르크) 역시 "드리블을 할 때 잔디가 버텨주면 힘으로 치고 나갈 수가 있는데 미끄러졌다"고 아쉬워했다.
물론 핑계로 들릴 수 있다. 잔디는 이란도 같은 조건이다.
하지만 신태용 감독은 "물론 이란도 같은 조건이다. 하지만 이란은 신체조건 덕분에 잔디가 밀려도 치고 나가는 힘으로 이겨낸다. 우리는 몸이 가벼워서 넘어지고, 공 컨트롤도 안 됐다"면서 "잔디가 좋은 곳에서 했으면 더 좋은 경기를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통 잔디 탓은 원정 팀이 해야 맞다. 홈에서 열리는 경기, 그것도 한국 축구의 성지라 불리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잔디 탓을 해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