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7년作' → '1554년作' 돌연 변경…실록 해석 논란
한미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문재인 대통령 전용기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던 문정왕후어보는 조선 명종 2년인 1547년 제작됐다가 한국전쟁 당시 해외로 불법 반출됐다. 그리고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가 수년간 반환협상을 벌인 끝에 66년 만인 지난달 2일, 고국으로 돌아왔다.
반환의 기쁨을 누릴 새가 없는 건 뒷북조사에 말바꾸기까지 열심인 문화재청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반환 당시는 물론 최근 6월까지도 해당 어보를 1547년에 제작된 어보로 밝혀왔다.
문화재청은 그러다 돌연 지난 19일 '다시 찾은 조선 왕실의 어보' 전시회를 통해 이 어보가 1554년 다시 제작됐다고 말을 바꿨다. 문화재청은 이 전시회에서 "해당 어보는 1553년 경복궁 화재로 소실돼 다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명종실록'에 보인다"며 "재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앞서 문화재청은 짝퉁 덕종어보의 재제작 여부를 늑장 파악한 데 이어 재제작 경위를 설명하는 순간까지 관련 자료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논란이 일었는데, 문정왕후 어보에서도 비슷한 행태를 이어가는 셈이다. (관련기사 : '짝퉁 덕종어보' 봉안 이완용 차남이…종묘일기 기록 확인)
자꾸 바뀌는 내용도 문제지만 문화재청의 주장처럼 관련 기록물에서 문정왕후어보가 재제작됐다는 언급을 찾을 수 없다는 것도 큰 문제다. 명종실록에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정왕후어보 총 3개 중 '성렬인명대왕대비지보(聖烈仁明大王大妃)'가 각인된 가상존호금보(加上尊號金寶·1554년 作)가 화재로 불타 다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문 대통령과 함께 국내로 들어온 어보인 '성렬대왕대비지보(聖烈大王大妃)'라 쓰여져 있는 '상존호금보(上尊號金寶·1547년 作)'는 명종실록에 관련 언급이 없다. 그런데도 문화재청은 이 어보 역시 재제작됐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가상존호금보'가 화재로 불타 다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니 '상존호금보' 역시 재제작됐을 것이란 '추정'이다.
문화재청 측은 "성렬인명대왕비가 문정왕후를 지칭하는 것이니 (재제작됐다는 관련 기록은) 결국 두 어보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관련 기록에는 '성렬인명대왕대비'와 '공의왕대비'에 대한 언급만 있고 이번에 환수된 문정왕후어보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없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객관적이고 충분한 문헌비판 없이 추정을 근거로 대통령의 환수품을 갑자기 제재작품으로 바꾼 것"이라며 문화재청의 근거 없는 뒷북 조사가 한미 정상회담의 의미마저 퇴색시킨다고 지적했다. 추정이 아닌, 엄밀한 사료비판을 통한 정확한 규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2015년 환수된 덕종어보가 1471년 만들어진 진품이 아닌 일제강점기 일본인 소유 '조선미술품제작소'에서 재제작된 모조품이라는 지난 18일 CBS노컷뉴스 보도에 "재제작된 덕종어보도 순종이 지시하고 종묘에 봉안까지 한 왕실 인정 유산"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CBS노컷뉴스 취재결과 종묘의 24시간을 기록한 사료 '종묘일기'에는 덕종어보가 친일파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가 제작하고 봉안한 사실이 기록돼 있었고 순종은 언급되지 않았다.
당시 국립고궁박물관은 종묘일기는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순종의 제작·봉안을 주장했다.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장 역시 "종묘일기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뒤늦게 인정하는 한편 "이항구가 (봉안주체로) 올라간 것은 유감"이라며 또 한 번 말을 바꾸기도 했다.
결국 이번에도 역사와 문화재를 다루는 문화재청이 기본적인 사료 조사를 소홀히 한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