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농구 대표팀의 허재 감독은 경기 초반부터 고함을 질렀다.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허재 감독이 이끄는 남자농구 대표팀은 20일(한국시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열린 2017 국제농구연맹(FIBA) 아시아컵 이런과의 4강전에서 경기 시작 6분만에 3-20으로 뒤졌다. 1쿼터 막판에는 6-27, 점수차가 21점까지 벌어졌다.
대표팀의 경기력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란이 자랑하는 신장 218cm의 간판 센터 하메드 하다디의 존재감을 넘어서지 못했다. 하다디는 가만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한국 선수들의 돌파를 막아냈다. 하다디 앞에서 어설프게 패스를 하다가 실책이 나온 장면도 많았다.
한국은 최준용을 투입해 3-2 형태의 지역방어를 앞세웠지만 의미가 없었다. 이란은 한국의 실책을 이용해 속공 득점을 노렸고 수비가 정돈되기 전에 빠르게 공격 기회를 엿보는 '얼리 오펜스(early offense)'를 추구했다.
◇전준범이 뿌린 '반격의 씨앗'
서서히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주역은 바로 전준범이었다. 전준범은 꽉 막힌 대표팀의 공격을 풀어줬다. 3-20 상황에서 첫 3점슛을 넣는 등 1쿼터 마지막 4분동안 3점슛 2개를 넣는 등 9점을 몰아넣어 숨통을 트여줬다. 한국은 1쿼터까지 13-30으로 뒤졌지만 희망을 발견했다.
대표팀의 집중력은 놀라웠다. 1쿼터 풀타임을 소화하고 하다디가 벤치로 물러난 2쿼터 초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30으로 점수차를 좁혔다. 하다디는 1분40초만 쉬고 다시 코트를 밟았다. 하다디를 오래 쉬지 못하게 한 것은 의미가 컸다.
하다디는 실수를 연발했다. 이란의 공수가 무뎌졌다. 한국은 반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준범이 자신의 재능을 활용한 득점을 올리지 못했다면 경기 흐름은 그대로 이란 쪽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세근 공격 끌고, 이승현 수비 밀고
이승현의 역할이 컸다. 이승현은 하다디를 주로 1대1로 막았다. 2년 전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하다디를 상대로 인상적인 수비를 펼친 적이 있는 이승현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힘을 앞세워 하다디와 맞붙었다. 하다디의 체력 소모는 점점 더 커졌다.
오세근과 이승현은 공격에서 하다디를 괴롭혔다. 발이 느려 외곽 먼 지역까지는 커버하지 못하는 하다디의 특징을 이용해 오세근은 꾸준히 중거리슛을 넣었다. 점수차는 계속 좁혀졌다. 한국은 33-39, 점수차를 6점으로 좁히고 2쿼터를 마쳤다.
한국은 41-48로 뒤진 3쿼터 중반 전준범의 3점슛을 시작으로 거침없는 공세를 시작했다. 전준범이 공격제한시간에 쫓겨 던진 슛이 들어가면서 대표팀의 기세가 살아났다.
이후 오세근의 연속 득점과 이정현의 3점슛 그리고 허웅의 외곽포가 폭발하면서 한국은 순식간에 스코어를 뒤집었다. 특히 '농구 대통령'으로 불렸던 허재 감독의 아들 허웅의 3점슛 2개가 결정적이었다. 한국은 3쿼터를 61-57로 앞선 채 마무리했다.
◇외곽 수비 그리고 실책에 무너지다
4쿼터 초반 오세근이 4번째 반칙을 범해 위기가 찾아왔다. 하다디의 침묵이 계속됐다. 하다디는 4쿼터 종료 4분을 남기고 첫 야투를 넣었다. 하지만 이란에게 계속 얻어맞은 외곽슛이 결국 화근이 됐다.
이정현이 공격 전면에 나섰다. 이정현은 3점슛 성공에 이어 추가 자유투를 넣는 '4점 플레이'를 선보였다. 또 절묘한 패스로 오세근을 비롯한 동료들의 득점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정현은 대표팀의 막판 추격 과정에서 두 차례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76-81로 뒤진 종료 1분43초 전 공을 흘렸고 78-83 상황이었던 종료 22초 전에는 작전타임 이후 인바운드 패스를 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제때 패스를 건네지 못해 5초 바이올레이션에 걸리고 말았다.
◇하다디를 잘 막았지만…
결국 대표팀은 81-87로 분패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하다디에 대한 수비는 비교적 잘 이뤄졌다. 하다디는 7점을 올렸고 야투성공률은 20%(10개 시도, 2개 성공)에 그쳤다. 2쿼터에는 덩크를 실패하는 장면도 나왔다. 실책도 6개나 범했다.
하다디는 14리바운드 8어시스트를 기록해 득점 외 다른 부문에서 팀에 기여했지만 한국으로서는 하다디의 압도적인 높이에서 파생되는 득점을 막은 것만으로도 선전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이란의 외곽포였다. 이란은 3점슛 16개를 시도해 9개를 넣었다. 성공률은 무려 56.3%. 하다디가 버틴 골밑을 신경쓰다보니 외곽이 빌 때가 많았다. 특히 이란은 4쿼터 고비 때마다 3점슛을 넣어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란의 새로운 해결사로 떠오른 포워드 카제미를 막지 못한 것도 패인이다. 카제미는 19점을 올렸고 야투성공률은 무려 88.9%(9개 시도, 8개 성공)으로 높았다.
◇졌지만 잘 싸웠다.
돌이켜보면 우왕좌왕 했던 1쿼터 초중반 승부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오세근은 21점 5리바운드를 올리며 분전했다. 하다디가 멀리 떨어지면 주저없이 슛을 던지는 판단력이 좋았다. 상대의 약점을 끊임없이 공략한 것이다. 3쿼터에는 오세근이 외곽에서 슛 페이크를 하자 이전까지 미동도 없었던 하다디가 움찔하는 장면도 나왔다.
전준범은 20점을 올리며 분전했다. 만약 한국이 승부를 뒤집었다면 그는 당당히 영웅으로 등극했을 것이다. 허웅은 10점을 보탰고 최준용은 10점 5어시스트 4리바운드를 올리며 분전했다. 이정현은 9점 5어시스트를 기록했지만 5개의 실책을 범하면서 빛이 바랬다.
비록 졌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 세대교체의 가능성을 보여준 대표팀. 이제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일만 남았다. 대표팀은 한국시간으로 21일 오전 12시30분 뉴질랜드와 3-4위전을 펼친다. 이 경기는 SPOTV를 통해 생중계된다. 한국은 조별예선에서 뉴질랜드에게 1점차 승리를 거둔 바 있다. 결승전은 이란과 호주의 대결로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