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후 6시 25분께, 서울 양천구 목동 방송회관 3층 기자회견장에서 한국독립PD협회 방송사 불공정 행위 청산과 제도 개혁을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방불특위) 주최로 '故 박환성·김광일 PD 추모와 방송사 불공정 행위 청산 결의대회'가 열렸다.
오는 10월 EBS '다큐프라임'에서 방송될 '야수와 방주' 촬영을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갔다가 지난달 19일 교통사고로 사망한 두 PD를 기리는 자리였다. 동시에 故 박 PD가 그랬듯 '간접비'라는 이름 아래 제작비의 일부를 환수하는 등 방송사의 일방적인 관행을 밝히는 자리이기도 했다.
◇ 독립PD가 따온 제작비, 왜 방송사 맘대로 떼 가나요?
Y PD는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방송'해 주는 대가로 제작비 중 25%, 40%를 떼었던 KBS의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정부기관 입찰을 통해 정부 정책을 홍보하는 방송사업 2개를 지난해와 올해 1개씩 따냈다. 지난해는 1억, 올해는 9천만 원 규모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Y PD에 따르면 독립PD들은 제작비를 지원해 주는 정부기관과 '직접 계약'할 수 없다. 정부기관은 제작비의 3할이나 5할을 KBS에 입금하고 방송 완료 후에 나머지를 입금한다. Y PD는 정부기관과 KBS를 연결해 주고 나서야 KBS와 외주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저는 사전에 돈을 받지 못한다. 모두 제 돈으로 진행하고 나중에 돈을 받는다. 제가 따 온 사업인데 제가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KBS가 정해주는 금액을 받는 것이다. 올해 계약서에는 25%라고 쓰여 있었지만 (이 수치가) 30%, 40%가 될 수도 있다. 지난 3월에도 금액이 정해지는 과정에서 저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주는 대로 받았다. 단지 CP에게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해외 두 나라에 가야 하니까 잘 좀 생각해 달라고.
(중략) 왜 이걸 떼 가지? 전파 사용료라는데, 제가 가져온 제작비인데 저하고 한 번도 상의 안 하고 편성의 대가라며 왜 수천만 원을 가져가는지, 그 많은 수신료를 받아서 어디에 쓰는지 궁금했다. 그 돈이 제게 바로 왔으면 촬영을 하루 더 나갈 수 있고, 촬영 차량도 기사를 붙여 나갈 수 있었고 드론을 한 번 더 띄울 수도 있었다.
밥벌이가 떨어질 수 있어서 나서지 않았는데, 이런 건 정말 불공정하다는 생각도 있고 故 박환성 PD의 죽음이 결정적이긴 했다. (오늘 이 사례 발표가) 제게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올지 모르지만 확실한 건 이게 옳은 일이라는 거다. 국장님, 저는 국장님을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KBS는 저를 미워할지 모르지만 국장님은 저를 이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밖에도 한국독립PD협회에 제보된 '방송사의 불공정 행위' 사례는 다양했다. 한 독립PD는 불과 지난달 모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위해 1500만 원을 협찬받았는데 고작 600만 원만 받을 수 있었다. 저작권도 방송사가 가져갔다.
다른 PD는 본인이 유치한 협찬금의 절반과 저작권까지 방송사가 가져가, 자신이 촬영한 영상임에도 영상 사용을 위해 사용료를 지불해야 했다.
또 다른 PD는 협찬만 전문으로 하는 협찬대행사가 있다고 밝히며 방송사는 좋은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앉아서 돈을 벌기 위해 외주제작사를 통한다고 지적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작사 대표 중에는 협찬만 따러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데도 방송사가 가져가는 금액이 많아 적자를 면치 못한다는 설명이다. 제작비가 작으니 경력 있는 PD와 작가를 쓰지 못해, 결국 프로그램의 질도 담보할 수 없게 되는 것.
◇ 독립PD들이 털어놓은 황당한 사연들
A PD는 "왜 박환성 PD가 남아공으로 가기 전에 자신이 불이익 받을 수 있는 일(방송사의 제작비 환수 관행)을 알리고 갔는지 알 것 같다"며 3년 전 KBS와 작업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박 PD가 주로 해왔던 동물 다큐를 (KBS 본사 PD는) 3~4일 만에 촬영한다는 계획을 갖고 갔다. 당연히 될 리가 없었다. 사자 한 마리, 코뿔소 한 마리 못 보고 개인 소유의 우리에 갇힌 사자 하나 찍었다. 그런데 그 즈음에 박 PD가 '환경스페셜'에 프로그램을 납품했는데, 그 영상을 쓰면 된다고 하는 거다. 박 PD는 방송사에 납품하면 저작권이 없다면서. 결국 8분 꼭지 중 2~3분 이상이 박 PD의 영상으로 메꿔졌다. 그 방송을 보고 굉장히 부끄러웠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자 촬영했던 박 PD는 (자신의 영상이) 남의 이름으로 버젓이 나간다는 것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 작품이 자기 것이 안 되고 빼앗기는 일을 수차례 겪어왔을 것이다."
B PD는 "지금 이 상태로 가면 대한민국 방송시장은 붕괴된다. 신규 인원이 유입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인건비가 가장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는 "자료 조사하는 막내작가, AD들의 임금은 10년 전에 받던 것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못한 수준이다. 최저임금도 안 되니 들어와서 일하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라며 "방송이 계속되고 시청자들에게 양질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려면 (저임금 문제는) 결코 좌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떠나가는 친구들이 많아도 잡을 수가 없다"고 고백했다.
최근 독립PD들의 고발로 방송사의 고질적인 관행이 수면 위로 떠올라, 방송통신위원회·문화체육관광부 등에서 '방송사-외주제작사 간 외주제작 실태조사'에 나서겠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정작 독립PD들은 실효성이 부족하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어느 노동연구원에서 (방송제작환경 실태조사를) 한다고 해 놓고 제작사 사장만 조사하고 끝났다. 문체부에 알아보니 독립PD 설문지를 거의 다 만들어 놨다고 하더라. 기초 면접 조사도 안 하고 어떻게 설문지 설계를 하느냐고 물으니 그제야 의견 조회를 한다더라. 하지만 작가, 조연출, 촬영·조명·음향 스태프들은 아예 조사할 생각이 없단다. 그들에게 우리는 원래 '없던' 사람들이었던 거다. (남아공) 가서 죽거나 말거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적당히 우리 이름 팔아서 픽션을 마치 다큐인 양 포장하는 행위, 우리는 이런 걸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료에게, 방송사에게 우리도 이렇게 당당하게 이 땅에 서 있는 주권자임을 반드시 우리 힘으로 알리자."
송규학 한국독립PD협회장은 "불공정 행위 청산, 이건 저희들(독립PD들)이 더 많은 임금 받자는 목적에만 그치지 않는다. 시청자들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질 높은 콘텐츠를 시청할 권리)를 돌려드리기 위해서"라고 강조했다.
송 협회장은 "사실 20년 전에는 이런 게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았다. 선배들도 이렇게 하고 방송사에서 이렇게 하니까. 한편으로는 프로그램 연출 기회가 주어졌으니 다행이라 여겼다. 예산에 대해 담당 CP 혹은 선배들과 얘기하면 '너 돈 벌려고 PD 하니? 돈 벌려면 다른 거 했어야지'란 소릴 들었고, 거기에 '맞아요' 하면서 살았다"고 고백했다.
이어,"후배들 앞에 너무 부끄럽고 너무 죄송하다. 저희가 제대로 (문제제기) 하지 못했던 세월이 쌓여 이런 큰 현실을 맞게 됐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거라는 말이 있듯, 이렇게 공론화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두 PD들이 그 자리를 만들어 준 것 같아 이제 멈출 수가 없다"고 밝혔다.
방불특위는 △책임자 처벌·공정위 조사 통해 위법 사실 드러나면 검찰 고발·국회 국정감사 △언론 유관단체·시민사회와 함께 심층 논의, 방송외주정책 제도 개선을 위한 대안 발의 △새로운 외주정책 수립·국회의원 공동발의를 통한 특별법 제정 등을 단계별로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한편, 한국방송학회는 오늘(17일) 오후 2시, 방송회관 기자회견장에서 '방송생태계 독립 제작환경 진단을 위한 토론회'를 연다. 최선영 이화여대 특임교수가 '방송업계 독립제작 환경 문제점 진단과 대책 마련을 위한 제언'을, 최우영 보다미디어그룹 제작본부장이 '다큐멘터리 공정계약-양자 간 계약에서 다자 간 계약으로'를 발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