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평 남짓한 크기의 초소는 전화기, 선풍기 등 누렇게 색이 바랜 집기들이 어지럽게 뒤널려 있었다. 남은 공간 대부분은 보관중인 택배상자들이 차지한 뒤였다. 몸을 눕히기는커녕 편히 앉기조차 힘든 곳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초소 분위기와 대조적인 물건 하나가 보였다. 갓 포장을 뜯은 듯 새하얀 피부의 벽걸이 에어컨이었다. 초소에서 가장 신참인 녀석이 최고참인 경비원 A 씨의 땀을 식혀주고 있었다.
에어컨이 설치되기 전까지 A 씨는 매일 밤 모기 또는 더위, 어느 쪽에 당할지를 두고 양자택일해야 했다. 그는 "폐쇄회로(CC)TV 설비가 내뿜는 열기 때문에 자다가도 초소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는데 이제 아파트를 더 잘 지킬 수 있게 됐다"며 허허 웃었다.
에어컨을 선물한 건 아파트 주민 김모(43) 씨다. 김 씨는 경비 초소에 에어컨이 없다는 걸 퇴근길에 우연히 발견했다. 사비 50여 만 원을 썼지만 아쉬울 건 없었다. 그는 '자랑거리가 아니다'며 한사코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해당 아파트 주민들의 '시원한 손길'은 지난 4월부터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설치된 에어컨은 모두 4대다. 한 주민은 아예 자기 사무실 에어컨을 떼어 주기도 했다.
에어컨 없이 지내는 동료 경비원들은 부러운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경비원 B 씨는 "한창 더울 시간에는 지하실이나 나무그늘로 대피한다"며 "부러워서 가끔 에어컨이 설치된 곳에 놀러가지만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관리사무소 입장에서는 주민들의 호의가 되레 부담스럽다.
이 아파트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마음 같아서는 초소 17곳에 일괄적으로 설치해주고 싶지만 전기요금이나 에어컨 수리비 때문에 설치를 반대하는 주민들도 적지 않다"며 난색을 표했다.
이 관계자는 또 "만약 이 문제로 경비원이나 주민들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면 이미 설치된 초소의 에어컨도 강제 철거할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경비초소 에어컨 설치 문제는 이미 한 차례 해당 아파트를 휩쓸고 지나갔다. 지난해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안건으로 다뤘지만 결국 부결된 것이다.
한 아파트 주민은 "좁은 공간에서 시원하게 일하게 한 것은 잘한 일이나, 우리 아파트 경비원들이 너무 많아서 경비비가 많이 나온다"며 불편한 감정을 애써 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