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판에서 10년, 우리도 사람답게 일해야잖아요"

[영화판 또한 일터다 ①] 표준계약서 도입됐지만…아직은 지키고자 노력중

일한 대가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노동자라 일컫습니다. 우리네 절대 다수가 노동자인 셈이죠. 영화 한 편을 만들고자 굵은 땀방울을 흘리는 영화계 수많은 종사자들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한국 영화산업은 국민 1인당 한 해에만 4편 이상의 영화를 볼 만큼 성장했습니다. 그 영화를 만들어내는 스태프들의 삶은 어떨까요. CBS노컷뉴스가 영화 노동자들의 일터를 들여다봤습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영화판에서 10년, 우리도 사람답게 일해야잖아요"
<계속>

일을 하면 하루에, 한 주에, 한 달에 어떤 종류의 일을 얼마나 하고 언제 며칠을 쉴지 명시하는 '근로계약'을 쓰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영화계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근로계약'이라는 것이 낯선 동네 중 하나였다.

각 분야 감독에서부터 말단 스태프까지 도급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당사자 한 쪽이 어떤 일을 완성할 것을 약속하면, 상대편이 그 일의 결과에 대해 일정한 보수를 지급하기로 하는 계약. '일하고 돈 받기'라는 큰 틀은 비슷해 보이지만, 도급계약은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지난 2011년 첫 선을 보인 '표준근로계약서'는 이같은 배경에서 탄생했다. 한 번 촬영을 나가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고, 고강도 노동 후에도 충분한 휴식이 주어지지 않으며, 급여 수준까지 낮은 영화계 스태프들의 노동 조건을 보다 낫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다.

올해 영화산업 노사가 체결한 표준계약서에 따르면 근로시간은 1일 8시간, 1주 40시간을 원칙으로 하며 스태프는 근로시간이 4시간일 때 30분 이상, 8시간일 때 1시간 이상의 휴식시간을 받는다. 근무일이 종료되면 다음 근로가 시작되기 전까지 연속해 10시간을 쉴 수 있게 하는 조항도 있다.

◇ 표준계약서는 스태프들의 생활을 어떻게 바꿨나

전국영화산업노조는 최대 12시간을 일하면 연속해서 최소 12시간은 쉬어야 한다는 장시간 노동 줄이기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사진=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영화판에 들어선 지 올해로 8년차가 된 A씨는 촬영팀으로서 지금까지 7~8편 작품에서 일해 왔다. 표준계약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3~4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선도적으로 표준계약서를 썼을 때(2013년)와 일치한다. 현재 참여 중인 영화 작업을 시작할 때도 표준계약서를 썼다. A 씨는 적어도 본인의 경우에는, 2년 전부터 영화에 들어갈 때마다 표준계약서를 쓴다고 밝혔다.

표준계약서는 하루 12시간을 일하면 12시간은 휴식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원칙이 칼 같이 지켜지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에, 월 노동 시간을 얼추 가늠할 수 있게 됐다. A 씨는 "예전 도급계약을 했을 때에는 (일하는) 시간이 명시돼 있지 않았다. 회차만 적혀 있었는데 그마저도 예상치였다. 그런 것에 비하면 나아진 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에는 감독이 '마음에 안 드니 다시 찍자' 하면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이제는 추가 촬영에 대해 근로자 대표와 서면합의를 거쳐야 한다. (스태프들에게는) 최소한의 보호 장치가 하나 생긴 셈이긴 하다"고 말했다.

10년 넘게 조명팀으로 다수 작품에 참여해 온 B 씨도 3~4년 전부터 표준계약서를 썼다. B 씨는 "하루 촬영 12시간을 지키려고 서로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비하면 좋아진 건 맞다"면서도 바로 체감할 정도로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은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영화인들도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B 씨는 "사실 도급이라고 해서 돈을 못 받는 건 아니지만, (표준계약서 도입을 통해) '우리도 사람답게 일하자', '왜 영화인들은 노동자로서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나' 하는 문제제기가 있었고, 그래서 저희에게 (사측이) 협상이라도 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영화산업노조 홍태화 사무국장은 "요즘은 표준계약서 쓰는 현장이 많아졌다. 30~40%는 되고, 아예 처음부터 '표준계약서 쓰자'고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며 '장시간 근로 감소'와 '스태프들의 임금 증가'를 긍정적 변화로 꼽았다.

주휴일을 갖기 시작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홍 국장은 "예전에는 촬영 없는 날이 휴일이었다. (촬영 전후 작업이 많은) 미술, 연출, 제작, 소품팀은 쉬고 싶어도 웬만해선 쉴 수가 없었는데 그들에게도 주휴일이라는 게 생기기 시작했다는 게 주효한 효과일 것 같다"고 말했다.

◇ 강제성 없는 문구, 많은 부분을 '합의'에 맡기는 한계


영화산업 노사는 올해 임단협을 통해 기존 표준계약서 2종(시간급/포괄임금용) 중 악용되어 폐해가 컸던 포괄임금용을 폐기하고 시간급으로 일원화하는데 합의했다. 하지만 1일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2015년 버전 표준계약서 2종(시간급/포괄임금용)이 올라가 있다.
표준계약서는 이전보다 구체적인 노동조건을 기재하는 성과를 이뤄냈지만, 아직 '표준'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실정이다. 영화노조가 지난해 3월부터 영화진흥위원회 월별 제작상황판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현재 한국영화 현장에서 근로계약 체결 비율은 43%, 4대보험 가입률은 45% 정도에 그친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내용을 '합의' 영역으로 두기 때문에 강제성이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다. 앞서 '표준계약서 도입 후의 긍정적 변화'를 설명한 인터뷰이들이 "이건 표준계약서가 잘 지켜질 경우"라고 한정한 이유다.

올해 표준계약서도 역시 원칙은 '1일 8시간, 1주 40시간 근로'지만 노사 합의 하에 1일 근로시간을 2015년 표준계약서대로 1일 12시간, 1주 52시간으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빈틈이 있다.

또 사측은 근로자 대표와 서면합의를 하면 △1일 12시간 및 1주 52시간을 초과하는 연장근로 △주휴일 및 휴게시간의 변경, 교통비 상한액 △연속된 10시간의 휴식시간 변경을 할 수 있어서 스태프들의 노동환경은 매우 가변적이다.

B 씨는 "(표준계약서 내용이 잘 지켜지도록) 서로 노력하고 있는 단계이지, '~해야 한다'까지에 이르지 못했다. 협의라고는 해도 모호한 계약조건들 때문에 (사측이) 촬영하자고 하면 거절하기가 어렵다. 또, '못 찍겠다'고 하면 나중에 제게도 불이익이 올 수 있기 때문에 힘들다"고 말했다.

A 씨는 "표준계약서를 쓰더라도 잘 지켜지는 경우는 (그 현장이) 되게 좋은 상황인 것이다. 계약 상의 갑인 사측이 더 찍자고 강하게 나오면 스태프 입장에서는 그걸 매번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전 스태프가 똘똘 뭉쳐서 집단 파업을 하면 추가 촬영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전했다.

올해 임단협을 통해 폐기된 포괄임금용 표준계약서가 아직도 현장에서 공공연히 쓰이고 있는 것도 문제다. A 씨는 "근로기준법을 근거로 표준계약을 하더라도 포괄임금제 같이 편법이 틈타고 들어올 부분이 많다. 그래서 각 영화마다, 혹은 제작사마다 포괄임금제 안에 적용하는 평균 시간치가 다르다"고 지적했다.

영화산업 노사는 2017년 임단협 당시 2015년에 탄생한 표준계약서 2종(시간급/포괄임금용) 가운데 연장·야간·휴일근로수당을 사전에 계산, 미리 임금을 산정해 지급하는 포괄임금용을 없앴다. 사전에 근로시간을 정하고, 그 기준을 넘을 때에만 초과수당을 주는 방식으로 변질돼 폐해가 컸다는 게 영화노조의 설명이다.

그러나 2017년 8월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홈페이지에는 2015년에 합의한 표준계약서가 올라가 있을 뿐, 2017년 버전으로 업데이트하지 않고 있다. 담당 부처의 직무유기로 발생한 피해는 고스란히 영화 노동자들에게 돌아간다.

어느 정도 규모가 갖춰진 상업영화가 아닌, 저예산 독립영화의 경우 표준계약서 적용의 사각지대로 남아있다는 문제도 있다. 홍 국장은 "저예산 영화에서도 일한 가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제작자나 감독이 예전보다 많아진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제대로 된 페이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하고) 돈을 받는다는 게 아니라, 기술적인 경험을 하러 간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영화노조, 문체부에 '철저한 관리감독' 촉구

영화 '아버지의 전쟁'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지난 1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임금체불 소송청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유원정 기자)
지난달 중순, 연출을 맡았던 임성규 감독의 폭로로 영화 '아버지의 전쟁' 임금 미지급 사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군에서 의문사한 고 김훈 중위의 일대기를 그린 '아버지의 전쟁'은 당초 제작비가 27억 원으로 책정된 영화였다. 그러나 23회차 촬영까지 23억 원이 쓰였고, 50여 명에 달하는 조·단역 배우들은 2달 동안 노동한 대가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아버지의 전쟁' 제작사 무비엔진은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영비법)에 따라 표준계약서를 채택해 근로계약을 체결해야 하고,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하 노조법)에 따라 '영화산업 노사 임금 및 단체협약'을 준수해야 하는 위임사임에도 불구하고 두 법을 모두 위반했다. 제작사와 투자사는 임금 미지급 책임을 떠넘기기만 했고, 결국 스태프들은 소송을 청구하기에 이르렀다.

B 씨도 '아버지의 전쟁'에서 일한 스태프 중 하나다. 그는 "제작사는 투자사가 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투자사는 제작사가 비용에 맞춰 합리적으로 제작하지 못해 이런 일이 일어난 거라고 하고 있다. 투자사 쪽에서 임금 일부를 지급하겠다며 소송 전에 접근을 했던 걸로 안다. 하지만 저희가 합의금 얼마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이번 '아버지의 전쟁'에서는 피해자가 됐지만, 그는 지금까지 일해 오면서 돈을 못 받은 경우는 손에 꼽는다고 말했다. "제가 운이 좋았을 수도 있다"는 말이 꼭 붙어왔다. 근로기준법을 적용받는 표준계약서를 썼다면 법적 다툼까지 벌이지 않아도 됐을까. 그건 알 수 없다. 앞서 확인했듯 표준계약서에도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홍 국장은 "형식상은 표준계약서인데 내용은 아닌 경우도 있다. 대외적으로 제출하는 용도로 이면합의서를 쓰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표준계약서가 본래 취지대로 쓰여 '실효를 거두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감독해야 할 문화체육관광부의 분발을 촉구했다.

홍 국장은 "표준계약서는 투자출자사업 때도 사용되는데, 문체부는 정작 그 내용대로 잘 이행되는지 확인을 안 한다.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며 "문체부는 예술인복지법 관련해서 (표준계약서를 포함한) 자료 요청을 할 수 있고, 이를 거부하면 과태료도 부과할 수 있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영화노조는 문체부와 영화진흥위원회에 △영화산업 노동환경 개선의지를 명확히 하고 수정된 표준계약서를 반영할 것 △'영비법' 제3조의4에 따라 영화 근로자와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는 영화업자에 대해서는 영화발전기금에 따른 사업지원 불가 원칙을 천명할 것 △'영비법'의 '영화 근로자'에 관한 사항 이행(근로계약 이행, 표준계약서, 안전사고보호, 직업훈련실시, 임금체불 제제 등)을 철저히 감독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노조 역시 노조원들에게 보다 나은 처우를 보장하기 위해 임단협에서 신경 쓰는 부분들이 있다. 장시간 근로 줄이기가 대표적이다. '최대 12시간 일하고 최소 12시간 쉬자'는 영화노조의 슬로건은 방향성을 잘 보여준다.

다음 목표는 '직무별 최저임금'을 정하는 규정하는 것이다. 퍼스트, 세컨드, 서드, 4조수(서드 아래 스태프들을 통칭) 각 직급에 따라 출발점이 되는 임금 수준을 마련하려고 하는데, 아직 갈 길이 멀다. 보통의 회사라면 1호봉을 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아주 '기초적인' 기틀 잡기가 2017년 현재 영화계에선 여전히 '미완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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