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세월호 담았던 박종필 감독… "편히 쉬세요"

[현장] 광화문 광장에서 치러진 인권사회장

지난 28일 오후 4시, 강릉요양원에서 별세한 故 박종필 감독의 인권사회장이 31일 오전 10시,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다. 사진은 故 박 감독 장례식 자료집 (사진=김수정 기자)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시작하는 7월 마지막 주, 세상의 시선에서 비껴가 있는, 가장 낮은 사람들을 비췄던 영상활동가 박종필 감독이 숨을 거뒀다.

급히 꾸려진 장례위원회는 내심 걱정했다. 휴가가 시작되는 주말에 장례를 준비하면서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해 줄 수 있을까 염려했다. 그러나 생전에 박 감독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시민들까지 마음을 모아 주었고, 유가족들의 동의하에 인권사회장을 준비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던 31일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故 박종필 감독 인권사회장'이 열렸다. 세월호 참사 이후부터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를 거치면서 최근 몇 년 간 고인이 가장 많이 발걸음했을 장소에서, 많은 시민들이 그를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누가 부르거나 시키지 않아도, 한 대의 카메라가 아쉬웠던 현장에 늘 나타났다는 고인은 평생 빈민과 장애인 인권에 대해 탐구했고, 간암 진단 이후 카메라를 내려놓기 직전까지는 세월호와 촛불 광장을 담았다.

고인이 꾸준히 시선을 던졌던 현장에서 만났던 활동가들, 다큐멘터리스트들, 유가족이 각자 기억하는 박종필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장애인들에게는 '금관예수'였고, 다큐멘터리스트들에게는 살가운 선배이자 스승이었으며, 세월호 가족에게는 은인이었던 사람이었다.

고인의 사진 앞에 흰 국화가 놓여 있다. (사진=김수정 기자)
"나는 이 사회에서 거절당한 사람,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이다. 그래서 나의 하늘과 벌판은 얼어붙었고 나의 태양은 빛을 잃었다. 휠체어를 밀고 가야 하는 거리는 거대한 장벽이었다. 그 장벽에 갇혀 나는 추웠고 어두웠고 외로웠고 배가 고팠다. 그래서 나는 지하철로로 내려가 가는 지하철을 막았다. 세종문화회관 앞 도로에서 나를 태우지 못하는 버스를 쇠사슬로 묶었다. 한강대교를 6시간 기었다. 권력과 자본이 불평등하게 점유한 공간마다 점거했다. 어디서 왔는지 나와 같이 얼굴 여윈 사람들과 무엇인가를 찾아 헤맸다. 너무 곤욕스럽고 외로워서 외쳤다. 오 주여, 이제 우리와 함께 하소서. 우리가 절규한 그 자리에 주님은 없었고, 박종필 감독의 카메라가 있었다. 박종필 감독의 카메라는 가볍게 스치는 영상이 아니라 얼굴 여윈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되어 주었다. 절규가 되어 주었고 웃음이 되어 주었고 이야기가 되어 주었다. (중략) 장애인 운동 현장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공간에서 세월호의 망각과 기억 속에서 차별에 저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 살 만한 가치가 있고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기록해 주었다. 그것이 박종필 감독의 카메라이고 다큐였다. 그래서 박종필 감독은 나에게 금관예수이다."
_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

"박종필 감독의 장애인권 3부작 DVD 작업을 할 때, DVD가 출시됐는데 표지 인쇄가 잘못돼서 제 이름 한 줄만 빠져 버렸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미안해하더니 박 감독은 결국 제 이름만 다시 인쇄해서 일일이 딱지를 붙여줬다. 박종필 감독은 그런 사람이었다. 수고한 사람을 잊지 않았다. 그런 선배라서 저는 박종필 감독이 부르면 어디라도 갔다. (중략) 그는 '세월호를 만났다. 세월호는 나에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 곁에서 늘 카메라를 들고 있었던 박종필 감독의 마지막 선택지는 4.16연대, 세월호 가족들 옆이었다. (중략) 그러다 지성 아버님(안산 단원고 2학년 1반 문지성 학생 아버지)께 남긴 말을 들었다. 기력이 다한 몸으로 한 단어 한 단어를 힘겹게 뱉으며 박종필 감독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 우리는 뭐하는 사람이지? 우리가 뭐하는 사람이지? 우리는 감동을 주어야 하는 사람이야.' 종필 선배, 당신의 삶은 제게 감동을 주었다. 지성 아버님께 남긴 말을 제게 준 유언으로 삼겠다.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
_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박 감독, 기억나시는가. 영상 작업을 하며 어려울 때마다 영상 작업의 노하우를 전수하여 줬고, 끝까지 실무적 지원을 해 달라고 떼 아닌 떼를 쓴 적도 많았고 또한 대중들 앞에서 박 감독을 가리키며 그에게 영상 작업을 배웠노라고 당당히 이야기하던 추억들을. 그뿐인가. 돌이켜 보면 술자리도 함께 많이 했더군. 술은 안 마시지만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로, 사각지대에서 차별과 멸시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어려운 삶의 이야기, 이런 사회적 관점을 홈리스들과 활동가, 시민이 서로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협치할 수 있을지를 서로 언쟁도 있었지. (중략) 이제 모든 고통을 뒤로 하고 편안한 잠자리로 쉬시게. 그리고 이 세상, 아직 희망은 있다는 것, 희망을 놓지 않기 위해 많은 분들이 노력한다는 것, 저승에서도 꼭 기억하고 계시게. 나 또한 (당신이) 모든 걱정 다 떨치고 행복한 삶이 되시길 기도하겠네. 그리고 지금도 당신, 박종필 동지를 사랑한다네."
_ 임재원 홈리스행동 집행위원

전명선 4·16 가족협의회 공동대표가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수정 기자)
"박종필 감독님과 같은 운동가를 잃게 된 것은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아픔이자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사회운동가로서 영상을 통해 활동해 온 박종필 감독님은 우리 세월호 가족들에게는 은인이시다. 박종필 감독님은 정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인물로서 세월호 가족과 함께 진실규명을 위해 싸우다 순직하신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겠다.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가족과 진실을 원했던 국민들을 탄압했던 시기에, 박종필 감독은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감독님들과 함께 망각을 강요하는 박근혜 정부에 맞서 수없이 많은 영상을 제작했다. (중략) 박종필 감독님은 세월호 가족에게 거리에 나서야 하는 낯선 사회운동을 무한한 인간애를 통해 함께할 수 있도록 알려준 우리의 스승이었다. 저는 박종필 감독님의 헌신과 희생은 바로 사회운동가 분들이 말하는 것처럼 민중에 대한 사랑 속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박종필 감독님은 자신을 비추기보다 우리 모두를 비추고자 했다. 이제 우리가 그를 비추는 증거자가 되어야 될 것이다. 더욱 크게 살아내겠다. 박종필 감독님, 부디 영면하소서. 끝까지 기억하고 함께하겠다."
_ 전명선 4·16연대 공동대표

"감독님께서는 반차별 장애인운동가라는 것을 너무나 자랑스러워했다. 그 운동 속에서 차별받던 사람이 인간으로 거듭나는 그러한 과정들, 세상들이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운동을 지켜보면서 너무 자랑스러워 하셨다. 이제는 저희가 감독님께서 그 운동을 자랑스러워했던 것처럼, 그 길들을 잘 따라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감독님은 세월호 가족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많이 하셨다. (중략) 이제 세월호 아이들을 만나러 갈 수 있겠다고 말씀하셨고 만약에 하늘나라가 있다면 거기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냐고 물어보셨다. 아마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두수 형, 그리고 수없이 많이 돌아가셨던 동지들, 그리고 세월호의 아이들은 감독님의 바람대로 지금쯤 하늘에서 함께하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싶다.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 올곧게 살아야 된다고 정직하게 살아야 된다고 자신에게 카메라를 들도록 허락해 준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진실해야 된다고 했던 분."
_ 송윤혁 다큐인 활동가

"고인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이제 나흘째다. 앞으로 종필이는 서서히 우리의 기억 속에 희미해질 거다. 그러나 절대로 잊혀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제 동생 종필이가 해 왔고 추구했던 그 가치들은 계속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 확고하고 신념에 찬 가치들을 여기 많은 사람들이 이어줄 거란 확신을 가진다. (중략) 다정한 오빠였고 듬직한 동생이었던 그리고 우리의 아들이자 형제였던 사랑하는 박종필의 영원한 안식에 함께 배웅해 주신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머리숙여 감사드린다. 박종필은 허전하지 않을 것이다. 외롭게 가지 않았다. 감사하다."
_ 유가족 박종섭 씨

故 박종필 감독의 형 박종섭 씨가 유족을 대표해 인사하고 있는 모습 (사진=김수정 기자)
故 박종필 감독은…

1968년 4월 19일 서울 출생. 추계예대 미술학부 판화 전공. 졸업 후 사회운동을 고민하던 중 1998년 독립다큐 제작 집단 '다큐인'을 설립했다. 장애인 복지와 빈민 문제는 고인의 화두였다.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 '끝없는 싸움-에바다', '장애인이동권투쟁고보서-버스를 타자!', '장애인도 노동자다', '거리에서', '시설장애인의 역습', '뉴스타파 목격자들: 우리는 홀로 설 수 없나요?', '4·16 프로젝트: 망각과 기억' 등 다수 작품을 연출했다. 2015년부터는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 참여, 2기 위원장으로 팀을 이끌었다. 2016년부터는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에 참여해 광화문 광장을 지켰다. 고인의 마지막 현장은 목포신항이었다. 4·16 가족협의회 선체기록단으로서 세월호가 올라온 그날부터 함께 했다. 평생을 가난하고 차별받는 이들의 친구로서 영화와 영상을 통해 연대했던 고 박종필 감독은 2017년 7월 28일 간암으로 투병 중 강릉요양원에서 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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