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저녁 강원도 평창군 알펜시아 뮤직텐트에서는 평창대관령음악제의 저명연주가 시리즈 그 네 번째 무대로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이 콘서트 버전으로 한국 초연됐다. 사실 이 오페라는 국내 청중에겐 다소 낯설지만, 러시아 오페라의 본거지인 마린스키 오페라와 오케스트라가 내한해 러시아 오페라를 초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번 공연은 큰 기대를 모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마린스키 오페라와 오케스트라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물론 정식 오페라 공연이 아닌 콘서트 버전으로 연주되어 시각적인 전달력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구가예프가 이끄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의 대활약과 마린스키 극장 소속 가수들의 뛰어난 가창과 연기 덕분에 프로코피예프의 음악 그 자체의 매력은 더욱 부각되었다.
전 4막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은 카를로 고치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로, 당대 연극의 상투적인 관행을 풍자하는 원작에서 한발 더 나아가 기존 오페라의 진부함을 음악적으로 고발하는 '오페라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언뜻 이 오페라는 다양한 등장인물 때문에 복잡한 오페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한 왕국의 왕자가 심한 건강염려증에 걸려 왕과 대신들의 걱정이 깊다. 왕자의 병은 웃음으로만 치료된다는 의사의 말에 어릿광대 트루팔디노를 불러 온갖 오락을 보여주나 왕자는 웃지 않다가, 왕자의 웃음을 방해하려던 마녀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왕자는 우발적으로 웃음을 터뜨린다. 이에 화가 난 마녀는 왕자가 세 개의 오렌지와 사랑에 빠지게 되어 그 오렌지를 찾아 헤매게 될 것이라는 저주를 걸고, 왕자는 광대와 함께 세 개의 오렌지를 찾아 나선다. 왕자와 광대는 좋은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흉악한 요리사의 손에서 세 개의 오렌지를 훔쳐내는 데 성공하고, 우여곡절 끝에 세 번째 오렌지에서 나온 공주와 왕자는 결혼에 성공한다.
이런 과정에서 오페라의 성격은 희극과 비극, 멜로드라마 등으로 빈번하게 그 성격이 바뀌고 그때마다 '비극작가'나 '서정시인'들이 합창으로 논쟁을 벌이며 상투적인 오페라의 관행을 조롱하듯 끼어든다.
구가예프가 이끄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는 금관악기의 불협화음을 다소 찌르는 듯한 음색으로 강조하는 한편, 이 작품의 주요 모티브가 되는 '행진곡'의 리듬을 경쾌하면서도 또렷하게 표현해 이 오페라의 신랄한 면을 한껏 살려냈다. 때때로 오케스트라의 풍성한 사운드가 가수들의 소리를 압도하기는 했으나, 가수들은 후반으로 갈수록 공연장의 밸런스에 적응했는지 점차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 강력한 발성으로 관객들을 오페라에 몰입시켰다.
왕자와 함께 오렌지를 찾아 나서는 광대 트루팔디노 역을 맡은 멜리코프의 또렷하고 안정적인 가창, 왕좌를 노리는 재상 역의 시물레비치의 묵직하고 강렬한 음성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왕자 역의 일류쉬니코브와 요리사 역의 보로비에프의 코믹 연기 역시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내며 주목 받았다. 또한 제2막 후반에서 왕자가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에 이어 마녀가 왕자에게 오렌지의 저주를 거는 장면에서 해당 역을 맡은 시마노비치의 압도적인 가창은 오케스트라 더블베이스 주자들의 어두침침한 음색과 어우러지며 이 오페라에서 가장 중요한 소름 끼치는 저주장면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이번 공연에 마린스키 오페라 가수들과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국립합창단은 오페라의 프롤로그 부분부터 힘찬 합창으로 강한 인상을 전해주기는 했으나, 때에 따라 '비극작가'나 '서정시인' 등의 다양한 성격을 음악적으로 또렷하게 전달해내지 못한 점은 다소 아쉬웠다.
또한 이번 공연은 콘서트 버전의 오페라 공연이었던 만큼, 특히 왕자를 위한 여흥 장면이나 오렌지 속에서 공주가 나오는 장면 등에서의 시각적인 요소는 다소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구가예프가 지휘하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의 박력 넘치고 흥미진진한 음악에 더욱 귀를 기울일 수 있었고, 프로코피예프 음악 특유의 신랄한 개성과 독창적인 음향은 더욱 빛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