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한껏 움츠러들었던 세종의 과거가 30일(일) 밤 9시 40분 방송되는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 그려진다.
"우의정 이원(李原) 등이 계하기를, '지난번에 수재로 인하여 감선(減膳)도 하였고, 이내 어온(御醞)도 감량하였으나, 이제 추성(秋成)이 되어 벼농사가 풍성하니, 청하건대 그전대로 장만하여 올리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앞으로 상왕에게 말씀 드리겠다"하였다." - 세종실록, 세종 3년 9월 4일
세종은 세자로 책봉된지 단 두 달 만에 왕이 됐다. 하지만 군주로서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스물두 살의 젊은 왕 세종은 상왕인 아버지 태종의 그늘에 가려 국정을 운영해야 했다. 실질적인 군사 권력은 여전히 아버지 태종에게 있었고, 국정을 볼 때 역시 끊임없이 상왕께 아뢰야 했다.
이러한 세종의 나약한 모습이 드러난 결정적 사건이 벌어진다. 세종 즉위년 겨울 역모죄로 세종의 장인 심온이 압송된 것이다. 심온의 목숨이 위태로운 그날 밤, 세종은 아버지 태종과 연회를 즐겼다. 장인의 죽음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세종은 정녕 허수아비 왕이었을까.
"(대신이 아뢰기를) 이제(양녕)의 거취(去就)는 신들이 위임 받은 것이니, 전하도 사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외방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옳으며, 또 효령대군 이하 종실들도 항상 궐내의 상차에 있을 것이 아니라 각기 사택의 상차로 돌려보내고, 다만 조석전(朝夕奠)에만 참예하도록 하소서." - 세종실록, 세종 4년 6월 1일
태종의 승하 뒤 세종은 드디어 단독 군주가 된다. 그러나 여전히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으니, 바로 아버지 태종의 신하들로 가득한 조정이었다. 조정의 신하들은 세종을 상대로 기선 잡기에 나선다. "아버지의 상을 다 치르기도 전에 폐세자 양녕을 내쫓아내야 한다"는 조정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친 것이다. 세종은 결국 양녕을 유배지 이천으로 돌려보내고 만다. 그렇게 세종은 아버지의 권력이 사라진 뒤에도 기를 펴지 못했다.
세종 8년, 판세를 뒤집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권세가들이 뇌물 노비를 받고, 불법으로 노비를 편취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전말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 배후에는 무려 36명이라는 노비를 뇌물로 받은 당대의 권세가이자 태종의 오른팔이었던 병조판서 조말생도 있었다.
세종은 철저한 재조사를 통해 17명의 신하들이 132명의 노비를 뇌물로 받은 조선 초 희대의 뇌물사건을 밝혀낸다. 세종은 지난날 허수아비 왕의 모습을 털어버리고 비로소 우리가 기억하는 세종대왕의 얼굴을 찾을 수 있을까. 세종 반격의 전말이 '역사저널 그날'의 '세종은 허수아비 왕이었나'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