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범 수첩은 '한방'인가 '맹탕'인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안종범 전 청와대 수석의 수첩은 특검 수사는 물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 심지어는 삼성합병과 관련한 문형표 전 복지부 장관 재판에서도 항상 쟁점으로 등장합니다.

만약 안종범 수첩이 없었다면 검찰과 특검이 국정농단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또한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을 재판에 세우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말 그대로 '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만큼 안종범 수첩이 증거로써 가치가 있냐 없냐를 두고 재판에서는 검찰측과 변호인측이 날선 기싸움을 벌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우선 검찰측과 반대에 선 모든 피고인측 변호인들은 "안종범 수첩이 적법한 압수수색 절차로 수집한 것이 아니고 임의제출된 것이므로 위법수집된 것"이라고 한결같이 주장합니다. 곧 증거로써 가치가 없다는 것이죠.

이처럼 '뜨거운 감자'인 안종범 수첩이 최근에 또 쟁점이 됐습니다.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 김진동 부장판사)가 이 수첩을 '직접증거'로 인정하지 않고 '간접증거(정황증거)'로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재판부는 "수첩에 기재된 내용대로 박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과의 개별면담에서 대화를 했다는 진술증거로서의 증거능력은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다른 재판부가 결정한 것처럼 수첩에 기재된 내용에 대해서는 간접사실로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간접증거로 삼겠다는 재판부의 판단을 놓고 언론에서는 이 부회장의 뇌물죄 입증이 "불발 됐다"거나 "불투명해졌다"는 분석들을 상당수 쏟아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안종범 수첩이 예고편만 요란했지 '맹탕수첩'이 됐다며 이 부회장에 대한 뇌물죄 입증이 완전히 무너진 것처럼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끝말에 붙는 것은 '한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런 분석이 "완전히 틀렸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4개월에 걸친 장대한 재판을 너무 단순화함으로써 오독할 소지도 높습니다.

사실 현재의 국정농단재판은 개별사건과 개별재판부 형태로 돌아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이재용 부회장 재판과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은 재판부는 다르지만 사건의 성격은 똑 같습니다. 한 사람은 뇌물 공여자로 기소됐고 다른 사람은 뇌물 수수자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또 1심 판결이 이미 내려졌지만 문형표 전 복지부 장관 재판도 두 사람의 재판과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모든 재판이 현재 맞물려 돌아가고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자료사진)
그러나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재판은 "뇌물을 주고받은 적이 없다"고 본인들이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즉 자백이 없습니다. 자백없는 재판에서는 근원적으로 '한방'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인하는데 '한방'이 있을 수 없지요. 그래서 검찰측과 피고인측이 내로라하는 변호인을 고용해 재판에서 쟁점마다 첨예하게 맞붙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현재의 국정농단 재판의 실제입니다.

다시 안종범 수첩으로 돌아갑니다. 안종범 수첩은 애초 '직접증거'가 될 수 없는 물건입니다. 안종범 수첩 가운데 핵심 내용은 안 전 수석이 박 전 대통령의 '지시나 말씀'을 핵심키워드로 받아 적은 겁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박근혜-이재용 독대'에서 안 전 수석은 배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독대가 끝난 뒤나 나중에 박 전 대통령이 전화나 직접 지시형태로 전달한 내용을 받아적은 것이 안종범 수첩입니다.

안종범 수첩은 두 사람의 독대를 녹음한 녹음파일이나 녹취록이 존재하지 않는 한 구조적으로 '직접증거'가 될 수 없는 물건입니다. 정황증거로 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수순입니다. 만약 안 전 수석이 "(수첩에)대통령 말씀과 지시를 받아 적은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했다면 정황증거로서 가치도 갖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안종범 수첩을 놓고 '맹탕이다' '한방이 없다'라고 이렇게 논하는 자체가 별 의미가 없는 일들입니다.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재판은 이제 서서히 종반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7월말까지 재판절차를 종료하고 8월 하순에 선고한다는 것이 재판부 입장입니다.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죄 공판은 안종범 수첩같은 정황증거 또는 간접증거들의 싸움입니다. 특검은 삼성합병과 최순실 승마지원,금융지주사 설립 등의 문제에서 여러가지 간접증거를 내세워 뇌물죄를 인정받으려 할 것입니다.

반면 이재용 부회장 변호인들은 특검이 내세우는 간접증거를 탄핵하고 새로운 맞불증거를 내세움으로써 이 부회장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무진 애를 쓸겁니다.

이미 재판에선 박원오 전 승마협회 전무, 안종범 전 수석, 최순실씨의 독일계좌를 관리해 준 이상화 전 KEB하나은행 독일지점장, 김종 전 차관 등 핵심 증인들이 증인신문을 마쳤습니다.

재판부는 특검이 내세운 물증과 증인들의 신문결과를 토대로 간접증거로서 정황증거들을 놓고 유·무죄를 심판해 갈 겁니다. 이미 어느정도 속내가 기울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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