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후 4시 30분, 경기도 의정부시 천주교 신곡2동 성당에서 고 이한빛 PD의 추모제 '이한빛 PD를 잊지 않겠습니다'가 열렸다. 고인이 죽은 지 250여 일 만이다.
지난해 초 CJ E&M에 입사해 tvN '혼술남녀'의 조연출로 근무하던 이한빛 PD는 그 해 10월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의상·소품·식사 등 촬영 준비, 데이터 딜리버리, 촬영장 정리, 정산, 편집 등의 많은 업무를 도맡았던 그는, 이렇다 할 휴식 없는 장시간 노동과 폭언을 견딜 수 없었다.
CJ E&M은 고 이한빛 PD의 죽음에 선을 그었지만, 유가족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CJ E&M이 공식사과를 비롯해 고 이한빛 PD에 대한 명예회복, 재발방지 대책 마련 등을 약속하기까지 8개월이 걸렸다. 그의 추도식이 늦어진 까닭이다.
고 이한빛 PD의 어머니 김혜영 씨는 "이제는 한빛이가 외롭지 않게 떠나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정말 마음이 편해진다. 한빛을 가슴에 끌어안고 살았던 6개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 우리 가족에게 한빛 죽음의 의미를 붙잡았던 청년유니온과 함께해 주신 대책위의 35개 단체들, 성금과 용기를 주신 전국의 많은 시민들과 청년들, 한빛 친구들과 한솔(이한빛 PD 동생) 친구들, 한빛이를 따뜻하게 받아주시고 격려해 주신 신곡2동 성당 분들과 기도해 주신 많은 지인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많은 분들 덕분에 오늘 이렇게 추도식을 가질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했다.
김 씨는 "아직도 한빛이 제 옆에 없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서도 "지난 4월 18일 이후 보여준 여러분들의 연대와 지지는 한빛을 가슴에 묻지 않고 부활시켜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우리 가족에게 주었다. 한빛과 우리 가족에게 주신 사랑을 항상 기억하며 저희도 앞으로 나누며 열심히 살아갈 것을 약속드린다"고 밝혔다.
◇ 수많은 공감과 연대가 이끌어 낸 CJ E&M의 사과
그러나 지난 4월 18일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가 기자회견을 열어 고 이한빛 PD의 죽음이 CJ E&M에서 벌어진 '사회적 타살'이라는 점을 공론화한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CJ E&M 앞 1인 시위, 추모 문화제, 방송노동자들의 사례 제보, 토론회 개최 등이 이어졌다.
더구나 공시생과 학원강사 등을 주요 배역으로 해 혹독한 현실 앞에 무력한 청춘들에게 위로를 선물했던 '혼술남녀' 제작과정에서 무자비한 노동이 이루어졌다는 데 시민들은 경악하고 분노했다.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직시한 이들은, 다시는 이런 죽음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 19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심상정 후보도 고 이한빛 PD의 죽음을 언급하며 애도를 표한 바 있다.
그제야 CJ E&M은 잘못을 인정했다. 지난달 14일, CJ E&M 김성수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직원은 유가족과 대책위에게 공식 사과했고 앞으로 이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재발방지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관행적인 제작시스템 개선 △근무환경과 소통방식 근본 개선 등을 골자로 한 사과문은 3일 현재, CJ E&M 홈페이지(링크)에도 게재돼 있다.
김 위원장은 "(고 이한빛 PD의 사건은) 사회적 사건을 대하는 기업의 책임을 한 단계 성숙시켰고, 우리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기준을 제시했고, 폭력으로 점철된 첨단산업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각인시켰다. 무엇보다도 '이 바닥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젊은 노동자들의 냉소에 한 줄기 균열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감히 기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변화를 만든 것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이 자리에 모이진 못했지만 마음을 모아 준 바로 '우리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 방송노동자의 근로환경 개선은 여전히 '먼 일'
방송업계는 특히 노동자들을 '갈아넣는' 방식으로 유지돼 왔다. 일하면서 겪는 비상식적인 일에 대해 노동자들이 문제제기하면 "이 바닥은 원래 다 그래"라는 말을 듣거나, '방송 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참내기' 취급을 받기 일쑤다.
이런 가운데 고 이한빛 PD의 사건은 사용자인 CJ E&M이 직접 책임을 인정하고 재발방지책을 내놨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원래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되새기고, 꿈쩍 않을 것 같던 대기업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결정적 장면이기 때문이다.
후자는 '선진 업무 환경 구축'과 '방송제작 인력 처우 개선'을 골자로 하는데, 구체적으로 △프리랜서 AD 및 작가보조 용역료 인상·제작비 규정상에 명시 △적정 근로시간 및 휴식시간 등 포괄적 원칙 수립 △프로그램별 스태프 인력들에 대한 상해보험 가입 △외주사와 스태프 간 계약시 합리적 표준근로계약서 마련 및 권고 △내·외부 근무환경에 대한 부당한 처우 및 고충 처리를 위한 창구 마련 등의 약속이 포함돼 있다.
물론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 많은 방송사 중 이제 겨우 한 곳이 각성했을 뿐이다. 대책위 방송제작 제도개선연구팀의 민변 안지희 변호사는 이같은 변화가 더 폭넓게 전개되기 위해서는 국회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9대 국회에서 외주제작사-방송사 간의 불공정 거래 관행을 개선하는 법안, 영화산업 종사자의 근로환경 개선을 위한 법안이 발의돼 일부 반영됐으나, 방송산업 종사자들을 위한 방송법 개정 법률안은 없었다.
안 변호사는 "20대 국회에 방송법 개정 법률안이 총 24개 있는데 그 중 방송산업 종사자들의 근로환경 개선을 위한 입법은 단 하나도 없다. 수없이 1인 시위를 하고 추모제를 하고 CJ E&M이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지만 의원들은 법안 발의를 안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프리랜서 근로자성을 어떻게 인정해야 할지, 파견업체에 소속된 보조인력의 사용자를 누구로 정할지, 4대 보험은 어떻게 가입시키고 적용시킬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어떻게 전환할지, 방송산업 근로자들의 노동조합을 어떻게 만들지, 표준계약서의 실효성을 어떻게 제고할지, 제작인력의 저작권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 등 아직도 논의할 것이 많다"며 "국회에서 법안이 발의되고 통과되고 시행될 때까지, 잔인한 노동착취와 인권유린이 사라질 때까지 제도개선 연구팀에서 끝까지 노력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