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농사를 지어온 홍창표(63)씨는 "흙만 공짜로 준다면 싹 다 덮어버리고 싶다"며 착잡한 심정을 드러냈다.
가뭄에 어렵사리 모내기를 끝낸 경기도 안성시 대갈리. 작렬하는 햇볕 아래 숨이 차오를 정도로 폭염이 땅위를 뒤덮은 지난 23일, 홍씨의 갈라진 논바닥과 벼 줄기는 검은색 벌레로 까맣게 뒤덮였다.
습격을 받은 벼는 겨우 뿌리만 앙상하게 남았다. 중국에서 바람을 타고 건너온 '멸강충'이 모두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강토를 멸망시킨다'는 별명의 멸강충은 한 번 지나간 자리를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로 식성이 엄청나다.
전날 멸강충이 발견되자 두 번이나 방제를 했지만 홍씨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방제를 하지 않은 옆 논에서 넘어올 수도 있는데다, 번식력이 강해 죽지 않은 애벌레가 조금만 있어도 언제 다시 논 전체로 퍼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홍씨는 "한 번 줬는데, 잘 죽지 않아 두 번이나 약을 줬다"며 "가뭄에 벌레까지 생기면서 올해처럼 힘든 농사는 난생 처음"이라고 하소연했다.
멸강충의 습격은 경기북부 지역 농가들도 피하가지 못했다. 양주시 효촌리의 한 옥수수 농가는 2600여㎡에 심어져 있던 옥수수 수천 그루가 피해를 입었다. 이곳의 옥수수 잎들은 멸강충들이 갉아 먹어 치커리를 연상케 할 정도로 온전한 잎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농민 김상수씨(64)는 "옥수수가 어릴 때 멸강충이 잎을 갉아 먹으면, 크지 못하고 고사하고 만다"며 "조금만 늦게 방제하면, 하루 사이에도 옥수수 한 그루를 싹 다 먹어치울 정도"라고 울상을 지었다.
경기도농업기술원에 따르면 23일 현재 경기도내 피해면적만 120여 헥타르를 넘겼다. 미쳐 발견하지 못한 곳까지 고려하면 피해면적은 훨씬 더 늘어날 전망이다.
농업기술원은 이미 지난 19일 농작물 병해충 발생정보에 '멸강나방 주의보'를 발령한 상태다.
농업기술원 관계자는 "이번에 발생한 멸강나방은 5월 말부터 중국에서 날아온 성충이 꽃의 꿀을 먹은 후 지표면의 마른 잎에 알을 낳아 부화한 것"이라며 "현재 멸강충의 크기가 5∼15㎜ 내외 정도지만 최근 고온과 가뭄 지속 등으로 발육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멸강충은 물에 약하지만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면서 개체 수가 급증했다는 것이다.
특히 올해는 유충부터 성충까지 동시에 발견되고 있어 피해 기간이 예년에 비해 더 늘어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했다.
기술원 관계자는 또 "1령부터 5령까지 모두 관찰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멸강나방이 일시에 넘어 온 것이 아니라 긴 기간에 걸쳐 여러 나례 나눠서 넘어왔을 가능성이 높다"며 "이럴 경우 한 번 방제를 했다고 안심할 수 없다. 옆 논에서 눈에 잘 띄지 않은 어린 유충이 자라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올해는 7월 초중순까지 예찰 기간을 길게 잡아야 할 것 같다"며 "빠른 방제만이 피해 확산을 막을 수 있다"며 발견 즉시 신고해줄 것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