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품위 있는 토론을 기대했는데…어느 쪽 의견이 맞는다는 걸 떠나 정말 개탄스럽습니다."(지방 소재 법원 한 부장판사)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등 사법행정권 남용 파동으로 내홍을 앓는 사법부가 법원 내부망 '코트넷'에 신설된 익명 게시판으로 또 다른 진통을 겪고 있다.
최근 사태를 둘러싸고 양분된 판사들의 주장이 갈수록 격해지면서 서로를 향한 인신공격 등 도를 넘는 발언들이 게시판을 얼룩지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달 생긴 익명 게시판엔 19일 전국 대표판사 100명의 '전국법관대표회의' 이후 하루에도 글이 수십 개씩 올라오고 있다.
그런데 이 중 몇몇 글은 이번 파동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실명을 거론하는 직설적 비난이나 조롱을 담고 있어 법원 내에서도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예컨대 19일 회의에서 '거수기가 되기 싫다'며 회의 진행 방식에 반발한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익명 게시판에서 일방적인 몰매를 맞았다.
그를 겨냥한 한 글은 "어찌 '만연히' 그렇게 오셔서 준비 부족을 자인하는 말씀을 당당히 하시는 것인지, 까마득한 후배로서 안쓰럽다"며 비아냥댔다.
이번 사태를 촉발한 이규진(55·사법연수원 18기)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고법 부장판사)을 향해서도 "한가하실 텐데 내 밑에서 재판연구원이나 하시라"는 조롱 글이 올라왔다.
심지어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양승태 씨"라고 직함을 떼고 부르는 글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창보(58·15기) 법원행정처 차장이 "민형사상 문제가 될 수 있는 글을 자제하라"고 게시판에 공개 경고까지 한 상황이다.
익명 게시판이 생긴 것은 법원 내부망이 출범한 2000년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까진 불만이나 제안이 있어도 실명으로만 글을 쓸 수 있었다.
보수적인 법원 분위기상 오프라인에서도 판사들이 자기 생각이나 의견을 솔직하게 밝히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고 드문 일이다.
그런 만큼 다수의 판사에게는 익명 게시판에서 벌어지는 동료들의 가감 없는 발언이 다소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단독재판을 맡은 법원의 한 판사는 "우리가 유죄 선고를 내리는 '키보드 워리어'랑 다를 바가 무엇이냐"며 "저열한 민낯을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럽다"고 말했다.
다만, 일각에선 익명 게시판처럼 누구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사법부에 그간 없었던 게 근본적 문제란 해석을 내놓는다.
판사 개개인의 주장을 억누르는 건강하지 못한 조직 문화가 익명 게시판의 논란 글들뿐 아니라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를 불렀다는 시각이다.
한 부장판사는 "판사도 사람이고 현안에 대한 분노가 어떤 식으로든 표출되는 게 아니겠냐"며 "다만, 마음이 좁아져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안타깝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