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중학생인데 왜 겁이 안 났겠어. 그런데 곁에서 동지가 희생을 당하니 우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
강대훈(82) 전 대한민국학도의용군 회장은 광주 공업중 3학년이던 1950년 7월 22일 호림부대를 따라 전선에 나섰다. 그가 처음으로 총을 쏜 것은 그해 7월 말 진주 전투에서였다.
강 전 회장은 "조국을 위해서 집을 나섰지만 처음에는 총을 잡고 아무것도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동지가 총에 맞기 시작하니 그저 이들을 지키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만으로 전투에 몰입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경남 하동을 지나 진주를 거쳐 경북 영천까지. 3개월간 전장에서 생활하다가 귀가명령을 받고 전남 장성 북이면의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안은 초토화돼있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총대를 멘 사이 부모와 8남매 중 5형제가 북한군에 의해 몰살당한 것이다.
장남인 강 전 회장은 자신이 부모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대학 공부까지 마치고 교단에 선 강 회장은 수십년동안 참전용사 신청을 하지 않았다.
강 전 회장은 "직계를 포함해 우리 일가 희생자가 57명인데 아무도 국가보훈처에 등록하지 않았었다"며 "이승만 전 대통령이 후퇴하며 국민에게는 생업에 종사하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 대통령과 정부를 어찌 믿고, 혜택을 보면 얼마나 보겠냐는 마음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꽃다운 나이에 스러져 간 동지들의 죽음이 헛되이 되는 것이 안타까워 퇴직 후 학도의용군회장, 6·25 참전유공자회 광주 서구지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전국에 충혼탑과 공적비를 세우기 위해 노력해왔다.
강 전 회장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전국에서 학생 5만여명이 종군했다가 7천명이 전사했다.
육군본부에 등록하지 않고 혈서 등만 쓰고 현지에서 종군한 학도병은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사실이 입증된 사람만 참전용사가 됐으며 그마저도 순직한 많은 이들이 인정받지 못했다.
광주전남에서도 600여명이 종군했으며 당시 212명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 전 회장은 광주·전남 학도의용군이 활약한 주요 전투로 화개장터 전투를 꼽았다.
화개전투는 1950년 7월 25일 여수와 순천, 광양, 보성, 고흥, 강진 17개 중학교 학생 180여명이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서 남하하는 북한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70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된 최초의 학도병 전투다.
학도병들은 섬진강을 통해 전진하는 인민군을 6일간이나 저지했다.
강 전 회장은 "내 나라를 살리고자 한 일로, 많은 보상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후손들이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예우하는 마음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수난의 역사 속에 누가 어떻게 나라를 살렸는지 현실을 알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고 당부했다.